할머니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광천터미널에 차를 주차하였다. 주차장에서 나와서 터미널로 향하는데, 아파트 담벼락 밑에 어떤 할머니가 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벌어지고 있던 일은 다음과 같았다. 소나타 승용차가 바로 옆의 길에 서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아줌마가 후다닥 내리더니 검은 비닐 봉지를 그 앞에 두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 난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줌마가 그 할머니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그 안에 있는거 드세요"
음...무슨일이지?
나의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그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아줌마를 바라봤다. 그 아줌마가 나에게 말했다.
"그거 제가 사드린 거예요, 그 봉지를 좀 끌러 주세요"
"네?"
그때쯤, 신호가 바뀌어서 차가 출발해 버렸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 할머니와 그 아줌마 및 차에 탄 사람들의 관계는 대체 어떤 관계일까.
차는 가버렸고...난 할머니랑 이야기했다.
일단 봉지를 풀어보니 그 안에는 떡과 바나나와 방울토마토가 일부 들어있었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서 알맹이를 할머니에게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할머니, 댁이 이 근처예요?"
"뭐라고?"
"집이요, 집!"
"응, 이 근처야"
"댁으로 모셔다 드릴 테니까 알려주세요"
"모르겠어"
"집이 이 근처 아니예요?"
"응?"
"아까 그분은 따님 아니세요?"
"아니야"
이 시점에서, 나는 할머니를 일단 일으켜서 근처 상가 앞의 벤치로 모셨다.
"가족분 연락처 아세요? 전화!"
"몰라"
"댁으로 가셔야죠? 여기 계실 거예요?"
"집으로 가"
"집이 어딘지 아세요?"
"몰라"
이 순간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만약 아까 그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하자. 차에 다른 가족들도 다 타고 있는데 할머니만 놓고 간다는건 말이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할머니 앞에 음식물 조금 놓고 그냥 갔다면 이미 이 할머니는 버려진 상태일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들이 가족이 아니라고 하자. 가족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할머니를 어떻게든 도와줄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음식물을 주고 갔으니까. 음식을 사주고 갈 정도로 도울 의도가 있었다면, 즉, 그만큼 착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 도움은 거기서 끝났을 리가 없다. 그 호의를 악의적으로 해석한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베풀 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호의가 일반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의 특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 할머니는 현재 대단히 위험하다. 만약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를 모시고 간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고 그 사이에 할머니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만약 가족이 아니거나 또는 가족인데 할머니를 버려두고 그냥 가버린 거라면 다시 올 것이라는 보장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경찰서에 신고하여 경찰차를 불렀다. 10여분 후, 경찰관 두명이 오셔서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여기서부터는 경찰이 할 일이다.

사실 잘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바나나를 권하셨다. 땅바닥에 놓았다 다시 들어올리신 바나나를 권하셨다. -_-; 위생 관념이 그다지 투철하지 않은 본인인지라 그냥 받아 먹긴 했지만 누가 봤으면 "엄마, 쟤 흙먹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흙이 많이 묻지는 않았음을 알려둔다.

아무튼 할머니가 가족의 품으로 다시 가실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 가족이 따뜻한 가족이기를 바란다. 나의 이상한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는 것이 좋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것이 새삼 떠오른다.
by snowall 2009. 5. 30.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