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물리학 관련하여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걸 알게되어서..이렇게 문의차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제가 이제 곧 28이 되는 대학원 휴학생입니다.(전공은 식품공학) 27이 되던 해인 올 한해 동안 물리학과에 편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대학원까지 휴학했는데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습니다.

이유는 불안감이었습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과연 이 길로 가는게 맞는 것인지. 생각은 했지만 내가 물리학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런데 글을 찾다가 현실적인 답변을 써주신 걸 읽고서는 여쭤보고 싶어서 이렇게 쪽지를 보냅니다. 솔직히 제가 물리학에 대한 약간..아니 좀 큰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식품 쪽에서 연구를 해보았지만 연구를 시작하면서 그간 물리학에서 이루어놓았던 많은 연구업적들이 저에게 더 의미가 있고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나한테도 의미가 있지만 세상에도 의미가 있는 연구를 하려면 물리학을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어 당장에 휴학을 하고 공부를 시작한것입니다.

하지만 수학도 손에서 놨었던지라 다시 잡으려니 너무나 오랜기간이 걸리더군요..
영어도 해야했고..(제가 영어는 세상을 살면서 필요가 없겠다..라고 느끼고 공부도 제대로 안했었고, 대학원에 와서야 영어의 필요성도 깨닫고.) 왠걸 한국사도 해야겠다고 느껴서 한국사 공부하는데도 6개월정도 소비..(3급과 1급을 땄습니다..시험이 1월 5월 이렇게 있어서..;;)그러다보니 멍청하게도 정작 해야할 것들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핑계지요..내가 진짜 물리학을 하고 싶은건지, 할 수 있는건지..아니 나한테 맞는 건지.. 

다들 물리학은 재능이 있어야한다..아니면 못한다..그러니 나한테 재능은 있는 건지..모든게 불안해서 솔직히 공부를 하는게 하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어주시고..현실적으로 답을 해주셨으면 해서 입니다..

 

수학..못합니다. 다 잊어버렸다는게 맞겠지요..다시 해야합니다..물리학 진짜 기초적인 것만 현재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물리학을 할 수 있을지..재능이 있는지..아니면 재능이 있건 없건 제대로 도전을 해보던지. 뭐라도 좋습니다..실제로 물리학을 하셨던 분이시니 현실적인 충고나 질타를 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에겐 인생이 걸린 일입니다..어렸을 적엔 운동에 죽고 살았던 놈이라 공부 제대로 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리학으로의 진로가 제 길이 아니라면..저는 앞으로 무엇이 되었든 돈을 벌고 살 생각입니다..

 

학자로의 길을 가고 싶은 사람으로서 또 그 길에 있었던 분께(지금도 하고 계실 수도 있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길게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죄송합니다. 꼭 읽어주시고 ...욕을 써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뭐라도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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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학원까지 휴학하면서 물리학과 편입을 생각했다면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시나 보네요.

더 어릴적에 물리학을 하고 싶었는데, 겁내고 그냥 두다가 이제와서 좀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해라 마라 답을 줄 수는 없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부정적입니다. 이메일 보내신 내용 중, 가장 크게 눈에 띄는 문제점은 끝까지 해내지 못한게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서 어려운 이야기를 할 정도로 뭔가를 해내고 싶다면, 정말로 물리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것은 공감합니다.

현실적인 조언을 부탁하셨으므로 정말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무슨 일을 하든지 장래희망을 세웠을 때에는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1. 하고싶은가?
2. 할 수 있는가?
3. 해도 되는가?

이 세가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따져야 하는 이유는, 본인의 선택과 결심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항이면서 동시에 남들이 나를 평가할 때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가지를 만족한다면 나에게는 이 길을 선택할 충분한 명분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때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건 1번입니다. 하고싶은가?

정말로 하고 싶으세요? 물리학 공부라는 것이 지금 그럭저럭 잘 하고 있는 공부나 직업을 포기하고 올 정도로 좋으신가요? 어떤 이유로든 지금 잘 하고 있는걸 포기하고 도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도 될 정도로 물리가 매력적인가요?

남의 떡이라 더 커보이는 것일 수 있고, 어릴적에 부러워했던 어떤 이유때문일수도 있어요.
어느정도 사회생활도 해보셨을 것 같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하셨으니 잘 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그 어떤 멋진 삶도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서 경험해보면 아주 치열하고 피터지는 고생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매일 놀고 먹는 것 같아 보이는 노숙자의 세계에도 살아남기 위한 어마어마한 경쟁이 존재하죠.

지금 물리학이 멋있어 보이는건 그런 효과때문일 수도 있어요.

물리학이 멋있어 보인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 일은 그것과 아무 관련이 없죠. 운동을 열심히 했고, 한국사 자격증을 땄고, 식품공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으니 누가 봐도 물리와 관련 없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리가 하고 싶다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안 믿어줄겁니다.

저도 물리학과 대학원 입학 면접 볼 때 그 좋은 직장 다니지 왜 진학해서 사서 고생하냐고 질문 받았습니다. 저는 그나마 물리학 학사에 광학 연구소에서 일했으니 물리학에 대한 열정이나 목표 등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고요.

자신이 물리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일단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세요. 그리고 남들에게도 증명하셔야 해요.

나에게는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있다고. 그 열정은 너희들이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화끈하고 폭발적이라고. 증명하셔야겠죠. 지금까지는 말로만 좋아한다고 하고 실제로 전혀 실천하지 않아왔어요. 최소한 지난 8년간은.


1번의 하고싶은가? 를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엔 할 수 있는가?의 걱정이 생기겠죠.

이건 앞서의 걱정과 연계되어 있는데, 말씀하셨듯이 수학은 놓은지 오래고, 물리학도 그다지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되지는 않네요.

그럼 할 수 있는건가?

재능이 없는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능이 없는만큼 더 큰 고난이 따라오는데, 그걸 메꾸려면 1번에서 이야기한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물리학 박사를 받는다고 하면, 학부 수준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 최소 10년에서 길게는 15년정도 걸립니다. 그러다가 실패한다면 불혹의 나이에 고학력 백수가 됩니다. 이건 각오한다고 버틸 수 있는게 아니에요. 닥쳐보면, 내가 되지도 않는거 헛짓하다가 인생 낭비했구나 하는 후회가 한방에 몰려옵니다. 이걸 극복할 수 있는 '좋아함'이 필요한 거예요.

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아직 아주 늦지는 않았으니 기초부터 시작하면 어떻게든 가능은 하다고 답하겠습니다. 대신,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또는 전혀 들어본적도 가본적도 없는 외국의 낯선곳에 뚝 떨어져서 말도 한마디 못하고 치이듯이, 그런 고생길을 가게 된다는 걸 알아두세요.

2번을 잠시 미뤄두고, 3번부터 물어보죠. 해도 되는가?
뭐 불법은 아니므로 얼마든지 해도 되죠.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어요.
제가 아는 분 중에, 39살에 대학원에 입학해서 4년만에 박사학위 받고 지금은 고등과학원에 박사후연구원으로 가신 분이 있습니다.
기계과 졸업하시고서 대기업에 취직해서 잘 다니시다가, '더 늦으면 못하겠다' 싶어서 사모님에게 허락받고 입학하셨답니다.
20대 초반에 입학한 학생들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다니셨다고 하네요.

뭐든지 가능은 해요. 그에 따르는 노력만 할 수 있다면.

본인을 한번 되돌아 보세요. 물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 지금까지 안 했던 만큼 그걸 메꾸기 위한 피를 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없으면 오지 마세요. 자신있어도 웬만하면 안오는게 좋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 어차피 100년이면 죽을건데 나를 위해서 10년정도 쓰는 것은 낭비가 아닌 나에게 줄 수 있는 정말 호화스러운 최고의 선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세요.

한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은건,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으니 그 대학원에서 하는 연구를 일단 마무리 지으세요.

그 연구에서 물리학적인 방법론이나 물리학의 연구 도구를 사용하여 독창적인 연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리학 자체는 굉장히 열린 분야라서, 물리학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구에 물리학을 끌고 와서 연구해도 얼마든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요. 물리학 박사라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물리'를 하면 됩니다. 잘 모르겠으면 물리학과 수업을 따라다니면서 듣고, 물리학과 교수님이나 연구원들 찾아다니면서 친해지고 물어보고 토론하고.

그렇게 해보면 물리학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감이 올 거예요. 그 다음에 만약 그때에도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싶다면 그렇게 친해진 물리학과 교수님들에게 진학 상담을 해 보세요. 보다 긍정적인 답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제가 답변드린 것 보다 현실적인 답이 나올 거예요.

나의 마음과 나의 의지는 타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에는 객관적으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내가 지금 보여준 결과만을 바라봅니다. 지금 질문하신 분께는 물리를 좋아한다고 증명할 과정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그럼, 정말 하고 싶다면 만들어 나가야죠.

그것은 편입이 될 수도 있고, 대학원 진학이 될 수도 있고, 뭐 어떤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대학원 진학은, 특히 전공을 뛰어넘는 진학은 누가봐도 미친짓이예요. 그만큼 제대로 미치지 않았으면 해서는 안될 짓이죠. 만약 그렇게 미쳐있다면 저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서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도 기어이 물리학과에 가겠다고 펜을 쥐고 있겠죠.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고, 그 결과에 책임도 자신이 지는 거예요. 도전은 용기이지만, 때로는 포기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참고하시고, 결정은 알아서 하세요.



by snowall 2013. 12. 3. 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