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참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다. 어쩌면 그리 나한테 한푼 두푼 빌려달라고 말들 하는지, 얼마나 가난했던지 빈 주먹을 들어 보이며 돈을 달라고 하더라. 돈 없다고 빈 손바닥을 보여주면 마치 주먹이 보자기를 이기는 줄 알고 있는지 계속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아니, 그럼 가위를 내밀던가. 길가다 만난 처음 보는 아이도 얼마나 가난했으면 며칠간 씻지도 못한 것 같은 기름 꼬질꼬질한 더벅머리에 크기도 잘 맞지 않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었다. 가끔은 운동화도 바꿔 신자고 한다. 물론 내가 빌려주고서 이자는 고사하고 돌려받은 적도 없다.
이런 아이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은 물론 학교 근처와 학원 근처이고, 오락실 근처이며 학생들이 자주 가는 곳일 수밖에 없다. 동물은 먹이가 있어야 먹고 살 것 아닌가. 사실 학교 교실 안에서도 이러한 채무자가 항상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는 사채관계는 공공연하게 맺어지는데, 사채업자인 쪽이 채무자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이러한 관계는 사채업자의 부모님 지갑 사정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가끔은 사채업자쪽이 채무자들에게 채권을 행사하려다가 폭행을 당하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는데 이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흥미로운 것은 돈을 주는 놈이 잘못한 것이라고 오해를 받는 것이다. 받지 못할 것이 뻔한데 왜 빌려주냐는, 뭐 그런 논리다. 애초에 빌려가서 안 갚는 놈이 나쁜놈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돈을 빌려주는 쪽이 잘못했다고 지탄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빈 주먹을 가진 가난한 아이들은 매번 돈을 빌려주는 애들에게서만 돈을 빌린다. 못빌려준다고 한번 인상 팍 쓰면 쫄아서 두번다시 얘기를 안하고 그냥 빌리던 데서 빌려간다. 물론 갚을 생각은 없지만.
그러다가 어느날 학생주임이 나타난다. 학생주임은 돈을 빌려준 놈이나 빌리고 안 갚는 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걸리면 양쪽 다 작살난다고 위협한다. 그럼 돈을 빌려준 놈은 억울하지. 잘못이 없거든. 가난한 아이들에게 적선한게 그리 잘못이던가? 학주[각주:1]는 야구 방망이 하나를 위협적으로 들고 다니면서 어디 걸리는 놈 없나 주시하고 다닌다.
예의 그렇듯, 돈을 빌리는 아이들 중에서도 두 부류가 있어서 학생주임에게 고분고분한 쪽이랑 대드는 쪽이 있는 법이다. 학생주임에게 고분고분한 부류는 사실상 학생주임에게 인정받은 가난한 아이다. 이들은 대놓고 다른 아이들에게 돈을 빌리고 다녀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드는 쪽은 학주의 마음속에 깊이있게 찍힌 부류들이다. 이들은 아무것도 안해도 괜히 걸리면 방망이로 처 맞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억울한 마음에 파스라도 사서 붙일 돈이나 마련할 요량에 더 많은 돈을 빌리게 된다.
그리고 이건 모두 아는 사실인데, 애초에 처음부터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나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아이들을 양산해내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돈있는 집안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든 현실은 현실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학주가 가난한 아이들을 모두 때려 잡든가, 가난한 아이들이 모두 회개하든가, 부잣집 자식들이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않든가,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데 학주가 이미 가난한 아이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이상 이 세가지 일들은 모두 일어나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갑자기 어느 학생이 현실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 어째서 가난한 아이들은 혼자 먹고 살려고 하지 않고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서 빌어먹고 사는가. 이러한 의문점이 든 그 학생은 돈을 가장 많이 빌려가고 학주 눈밖에 나기도 했다는 교내의 어느 가난한 아이를 직접 찾아간다.
"넌 왜 돈을 직접 벌지 어째서 남의 돈을 빌려서 갚지도 않는거냐?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알바라도 해서 돈 벌 수 있잖냐."
라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 응. 맞는 말이다. 그러자 이 질문을 들은 가난한 아이가 대답한다.
"넌 누구한테 돈 빌려준 적도 없으면서 그따위 헛소리를 잘도 말하는구나.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되겠냐?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금지하고 있는데다가 걸리면 학주한테 맞아 죽지, 그렇다고 집안 형편이 좋아서 내가 쓸 용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지, 돈 없으면 밥도 굶어요. 넌 때려 죽여도 이해 못하겠지만, 난 부모님이 돈 내줘서 급식 먹는 자식들이 가장 부러워. 알겠냐? 얘기 다 들었으면 좀 맞자."
말을 똑바로 한 죄로 그 학생은 입이 삐뚤어지도록 맞고 간신히 돌아갔다. 하여,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하는 말씀이
"임마 넌 그런 애들한테 뭐하러 가서 얘기하냐. 애초에 상종을 말았어야지.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되는걸 어쩌자고 가서 그렇게 맞고 돌아오냐. 너 맞고 다니면 우리 마음은 편하겠냐? 걔들 마음 바꾸게 할 생각 하지 말고 너나 몸 조심하고 다니란 얘기다."
사실 그 가난한 아이는 집안이 가난해서 그렇지, 여기저기서 학생들에게 빌린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운동화도 최신형으로 사고 오락실도 자주 다닌다. 어차피 그렇게 돈을 빌려주게 되면 그게 그 가난한 친구 먹고사는데만 들어가는게 아니라 쓸데없는 유흥비로도 지출되는 것이다. 이것도 모두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 가난한 아이에게 맞고 돌아온 사실을 담임 선생님에게 신고하였으나 담임 선생님은 자신이 학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학주는 맞은 놈이 잘못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맞고 돌아온 학생은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다시한번 그 가난한 아이에게 가서 얘기를 꺼내볼까 생각중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은 없는데, 이 얘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한국인 납치사건의 스토리를 패러디한 것이다.
 * 가난한 학생이라고 표현한 것이 결코 폭력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는 아님을 일러둔다. 일부러 그렇게 표현하였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단지 길가는 학생들 잡아서 푼돈 뜯어먹는 양아치들이 자기 손으로는 결국 돈 한푼 벌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 학생주임의 줄인말 [본문으로]
by snowall 2007. 9. 2.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