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같이 입사한 입사 동기중에, 성격이 매우 착한 사람이 있다.

근데, 나는 이 사람에게 나의 속 깊은 얘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왜 그런가?

그는 나에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그거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 시시콜콜한 얘기의 내용이 문제다. 연구실에서 뒤로 들은 자기 연구실 속사정이라든가, 연봉 얘기 등을 꽤 쉽게 꺼낸다. 그 사람의 경력으로 봤을 때, 계속 학계에만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운전면허를 신청했다는 얘기부터 면허증 받았다는 얘기까지, 거의 매일 들으면서 - 대체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학생회관 지하에 미장원이 있다는 얘기를 왜 해주는 것일까. 학생식당의 식사는 A코스와 B코스가 있는데 교직원식당에서는 B코스가 똑같이 제공되고 대신 리필이 안된다는 얘기를 왜 해주는 것일까. 그것도 3번이나.
장례식장을 29살 될 때까지 한번도 안 가봐서 잘 모른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데...대책이 없다. 상세히 가르쳐 주긴 했지만. 주워들은 얘기도 없던 것이었을까. 29살인데, 왜 26살인 나보다 경험이 적어보이는 걸까. 전에 있었던 연구실에서 나름 막내였다고 자랑하지만...그건 자랑이 되질 않는다. 대학 연구실에 29살이 막내면 그만큼 지원자가 없다는 뜻일텐데, 그닥 인기있는 전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번은, 연구소 건물 지하에 있는 체력단련실을 가게 되었다. 그 사람이 같이 가자고 꼬셔서 갔다. 오오...갔더니 무려 "드럼"과 "키보드"가 준비된 밴드 연습실도 있는 것이다. 난 기쁜 마음에 드럼을 좀 쳐봤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 사람이 그 다음날 부터 점심 때마다 "오늘은 드럼 안쳐요?"라고 물어보는 거다. -_-; 드럼을 혼자 왜 치나요...밴드도 없는데...
며칠 듣다가 그거 물어보지 말라고 했다.

내가 이 사람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첫날부터였다. 12월 22일에 첫 출근을 했다. 그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이것저것 절차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난 "내일부터 쉬지도 않고 제대로 출근 하려고 하니 힘들것 같아요. 아~ 쉬고싶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은 "내일 출근 안해요? 하는 거잖아요?"라고 답했다. 이건...무슨 인공지능 채팅기계와의 대화도 아닌 것이, 그 답을 듣고 나니 참 답답하더라.
아무튼, 나는 그 다음에 "네, 출근은 하죠. 쉬고 싶다는 얘기예요. 26일도 사이에 끼어 있어서 쉬었으면 좋겠지만, 출근 해야겠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26일부터 출근해요?" 라고 답을 하더라. 이건 뭔소리여...
그래서 그냥 "아뇨, 내일부터 출근하는거죠"라고 말하고 그냥 말을 접었다. 여기까지였으면 사실 그냥 좀 답답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넘어가겠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게 오전에 있었던 일이고, 오후가 되었는데, 나를 담당한 박사님이 날 부르시더니, "기환씨, 26일날 휴가 낼거야?" 라고 물어보신다. 뭐야, 이건??
"아뇨, 들어오자마자 무슨 휴가를 갑니까. 출근 해야죠" 라고 일단 대답을 했는데...
"아...그렇지? 아까 행정실에서 자네가 26일날 휴가를 내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럴리가요. 전 그냥 26일이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쉬고 싶다는 얘기를 빈말로 했을 뿐인데요"
"응, 그런거지? 혹시라도 휴가 가거나 무슨 일 생기면 나를 통해서 얘기 해야돼. 직접 얘기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난 26일날 쉬고 싶다는 얘기를 연구소 내에서는 딱 한명에게밖에 안했다. 당연히 그 사람이 행정실에 가서 얘기를 했을 거고, 그 얘기가 이렇게 전달되어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아니 그걸 왜 가서 물어보냐고요...
그 사람의 의도는, 내가 휴가를 내고 싶어하는 줄 알고 행정실에 미리 물어봐 준,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그 속에 담겨있겠지만, 이래서야 내가 번거로워질 뿐이다. 난 애초에 휴가는 커녕 25일도 출근해야 한다면 출근 하려고 했었다.
남의 사정에 너무 신경을 써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주면, 정말 번거롭다. 더욱이, 만약 이 일이 더 크게 벌어졌으면 내 평판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겠지. - 신입이 들어오자마자 놀고 먹을 생각이나 한다고.

그 사건 이후로 - 첫 출근 후 6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 난 그 사람이랑은 아주아주 가벼운 얘기만을 나누기로 했다.

나도 계속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긴 하지만, 자신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 힘들다. 그것도, 정말 선의에 의해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은 더더욱 괴롭다. 이런 사람을 만난건 내 인생에서 딱 두번째인데, 이래저래 힘들기만 할 뿐이다. 더군다나 나 역시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지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냥 빈말만 주고받고 있다.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하겠지. 그걸 눈치챌 정도로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앞서의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을리가 없다.

아무튼, 크게 성공할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적당한 직장을 구하고 적당히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 될 것 같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추가 1.
별로 맘에 안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중의 하나가 더 생각났다.
자취방에 어머님과 조카가 와서 같이 살고 있다고...
...그걸 2주간이나 말하고 다녔다. 자랑인가?
아니...그닥, 어머님과 같이 사는거 자체를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29살씩이나 먹은 아들을 그 어머님은 얼마나 걱정되었기에 따라 내려오셨으며,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뭐랄까, "마마보이"의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느낌이었다.

추가 2.
최근, 나는 디지털 피아노를 사서 연습하고 있다. 이 얘기를 그 사람에게 했더니...
"한번 들려 주세요" - 지하 연습실로 가자는 얘기다.
"아...제가 외우고 있는 곡이 없어서, 악보가 없으면 연주를 못해요"
"대충이라도 한번 들려 주세요. 어차피 저는 음악을 잘 몰라서 괜찮아요"
"다음에 들려드릴게요"

잘 모르면 들려달라고 하지 마...-_-;

추가 3.
아직도 안 잊어먹고 피아노 친거 한번 들려달라고 한다. 자기는 음악을 잘 모르니까 대충 쳐도 모른다고.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음악을 잘 모른다고 하면서 내가 연습한 곡을 쳐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 심리 저편에는 호기심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내가 들려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음악적 감상 수준이 감동을 받을 수준인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데 공연을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봐서 내가 잘 치는것도 아니다. 게다가 남자다.
내가 피아노를 그 앞에서 쳐줘야할 이유가 단 한가지도 없다. 그냥 내가 지금 연습하는 곡의 Mp3파일을 보내주고 끝낼까 싶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피아노를 쳐 달라고 요구할 것 같다. 좀 알아 들어라. 제발. 나도 그런 부류이긴 하지만,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은 참 답답하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명시적으로 할 수도 없잖은가.

추가 4.
내 자동차는 왼쪽 뒤쪽의 범퍼가 상해 있다. 그것은, 전에 잠깐 살던 아파트에서 깨먹었다. 거긴 주차가 후면주차이고 그것도 기울어져서 주차를 해야 한다. 그때, 딱 한번 라디오 들으면서 주차하다가 라디오 사연이 너무 웃겨서 잠깐 정신줄을 놓은 사이에 벽에 박아서 생긴 상처다. (물론, 그 다음에 주차되어 있는 무쏘 범퍼에 같은 장소를 받은 얘기는 빼도록 하겠다. 무쏘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으니까. -_-)
며칠 전 퇴근길에 마주쳤는데, 차에 올라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기환씨 차예요?"
"네"
"구경좀 할게요"
그러더니.
"여기 깨졌네요? 운전을 못하시나봐요"
"아뇨, 실수해서...-_-"
내가 운전을 잘하는데 운전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건 기분이 나쁜 일이고, 내가 운전을 못한다고 해도 운전 경력 5년인데 면허 딴지 4개월 된 아저씨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
그냥 말을 안했으면 좋겠다.
빈말이라도 "차가 좋네요"라든가 "운전 잘하세요?"라든가 물어보면 좋잖아.

추가 5
대부분의 직장은 아침 9시에 출근이다. 아침 9시 5분에 마주쳤는데 "일찍 나오시네요" 라고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는 그때 출근중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안녕하세요"라든가 "좋은 아침입니다"라든가 "좋은하루 되세요" 정도로 마무리 짓자.

추가 6.
교회 다닌댄다.

by snowall 2009. 5. 11.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