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때 윤리 숙제로 제출한 내용이다.
--------------------------------------------

제 1장 도교의 소개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도교는 한국의 철학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은 현재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도교의 뿌리라고 할 수도 있는 도가의 무위자연 사상, 그리고 종교로 발전한 여러 가지 사상들은 현대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몇가지 교훈을 줄 수 있다.
보고서의 주제로 도교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도교와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뿌리가 되는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도교의 연원과 그 사상을 간단히 알아본 후 도교의 현대적 의의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제 2장 도교의 역사
제 2장 1절 도교의 뿌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제자백가중 하나인 노자의 도가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사상체계인 도가와는 달리 종교적으로 발전한 중국의 민족종교이다. 도가사상은 이후 장자에게 계승되어 집대성 되었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 ․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야후! 백과사전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47477 )

제 2장 2절 도교의 발전
도교와 마찬가지로 사상체계에서 종교로 발전한 유형으로 유교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유교가 중국의 사회․국가의 질서, 그리고 학문․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의 질서 및 학문․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변괴귀물(變怪鬼物) 등 무축적 귀신신앙(巫祝的鬼神信仰)도 포함한다. 이 도교의 개념은 <민중도교>와 <교회도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민중도교는 농민이나 민중 일반의 신앙과 생활신조,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직원 집단이나 결사를 말한다. 이는 후한 말에 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송대 이후의 서민사회의 발전에 대응해서 유교나 불교 등과의 합일(合一)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교회도교는 국가나 왕조에 의하여 공인된 도교의 교단․교파이며, 5세기의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가 그 최초이다. 천사도는 원래 <삼장인 장릉(張陵)․장형(張衡)․장노(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었으며, 후한 말에 일어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초기의 민중도교였지만, 위(魏)․진(晉)의 정권밑에서 발전한 신오두미도(新五斗米道) 즉 신천사도는 북위(北魏)왕조의 공인(公認)에 의해서 교회도교가 되었다. (한메 파스칼 대백과사전)

제 2장 3절 한국의 도교 문화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무속(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http://cein.or.kr/~kupkika/cha1-1-19.htm)

제 3장 도교의 사상
제 3장 1절 도가의 ‘도(道)’사상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특수한 <도(道)> 사상의 강조로서, 학파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도>라는 것은, 현상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형이상적 성격을 띤 절대적 실재(實在), 혹은 이법(理法)이며, 유가의 사상 등에서는 강조되지 않았던 자연계와 인간계를 꿰뚫는 근원이다. 그것은 만물을 새로 만들어내어, 만물의 다양한 모습을 꿰뚫어서 그것을 그렇게 있게 하고 있는데, 그 작용은 자연적인 것이며 미묘하여 측량하기 어렵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무(無)>라 하며, 유일한 근원이기 때문에 <일(一)>이라고도 한다. 다만 도가의 주요목표는 이러한 <도>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현실적․실천적인 과제를 푸는 데에 있다. 그것은 차별․대립․항쟁이 격심하고, 항상 변동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며, 또한 어떻게 현실에 휘말리지 않는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처세적인 인생문제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도>의 이상적인 상태를 모범으로 삼게 된다. 특별한 인간적 소행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돌아가 절대적인 <도>를 따라 겸손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제 3장 2절 도교의 종교적 특징
도교는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뜻하며,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유교나 불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도교는 도가를 원류로 하는 도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다.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도교에서는 두가지의 방법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도술>이고 다른 하나는 <방술>이다. 도술은 나라를 다스리거나 백성을 교화시키는 등의 정치술을 이야기 했고, 방술은 선인이 되는 방법, 의료기술, 과학기술, 주술 등의 방법을 이야기 한다. 도술을 행하는 자가 도사이고 방술을 행하는 자가 방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후한대에 들어가면서 차츰 혼동되기 시작하여서 도사는 정치에 예언, 점복 등 방술에 해당되는 술을 행하게 되면서 도사는 이때부터 종교적 의미로서의 도사가 되었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방선도는 신선방사에 의한 종교집단으로, 그들 방사의 말을 믿고서 제나라나 연(燕)나라의 왕후귀족, 또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등이 불로불사의 신선약을 얻기 위하여 신선이 산다는 발해만 위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에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방사에게 신선의 약, 특히 황금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먹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되려고 하였다.(한메 파스칼 대백과사전)
이렇듯, 도교는 개인적인 영생의 성취를 위해서 믿어지기도 하였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믿어지기도 하였다.

제 4장 도교 사상의 현대적 의의
도교는 과거에 중국인들의 사상과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쳐서 두루 그 자취가 남아있다. 한국에도 그 뿌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현재에도 무속신앙, 풍수지리 등 많은 분야에서 도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에는 도교가 큰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떨치는 그리스도교,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는 불교. 한국, 일본, 중국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유교. 이들 종교들처럼 도교가 현대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라 불리우는 현대에도 여전히 점술가들이 인기가 있고, 부적 등이 사람들에게서 불안감 등을 씻어주는 일 등을 볼때, 정신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도교의 원류인 도가의 자연과의 일치 사상이나 소국과민의 정치 사상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큰 깨달음을 얻게 해줄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도교의 사상은 미신으로 몰아붙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위대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
덧붙임.
아래에 "신천지인 김덕호"라는 분이 트랙백을 걸었는데, 일단은 삭제하지 않고 둔다. 단, 나는 개인적으로 종교를 좋아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by snowall 2009. 11. 29. 2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