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14일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발굴 글이다.
내가 도대체 2002년에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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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과 결혼했다. 그래서 아들까지 두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피그말리온이 '인간'이 된 상아 여인을 과연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첫째로, 상아 여인은 인간이 되는 순간 그 자체로서의 완결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상아 여인을 조각 할 때 완벽한 모습을 조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은 상아 여인의 겉 모습이었을 뿐, 그 마음까지 완벽하게 조각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즉 상아 여인에게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결여된 상태에서 신에 의해 강제로 인간이 되었다면 그 인격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사랑한 것은 인간일까, 아니면 인간이 아니었을까. 여자처럼 생겼으니까 여성의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둘째로, 여자의 결점을 너무 많이 보았다고 하는데, 피그말리온은 그럼 여자들의 결점만 보고 그 결점을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은 하나도 보지 않았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듯 싶다. 그가 결점만 보아왔다면 그는 여자의 장점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완벽한 모습의 상아 여인을 조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혐오할 정도로 결점을 많이 보았다는 것은 그가 살던 시대, 또는 그가 살던 동네에 사는 여자들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결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다른 남자들은 그냥 잘 결혼해서 사는데 비해 그의 성격이 결벽증에 가까워서 완벽함이 아니면 전부 결점으로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이 신화의 한계가 드러난다. 피그말리온은 여자의 모든 것이 결점으로만 보였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는 상아를 이용해서 여자를 조각했다. 자신만의 완벽한 여인을. 그리고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궁극적인 상태인 ‘생명’까지 원하게 된다. 그런데 상아 여인은 상아인 상태일 때는 누군가 부수지 않는 한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영원함이 깨진다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완벽함은 사라진다.  

셋째로, 아프로디테 신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려서 상아 여인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이것은 실은 변명이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은 속마음이 어떻든간에 분명 "상아처녀와 같은 여인"을 원했었고, 아프로디테는 그의 소원을 정확하게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그가 원하는 것처럼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과 같다.
그는 상아 속에서 완벽한 여인을 찾아냈지만 결국 인간이 아니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원래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된 상아 여인과 사는 피그말리온은, 상아 여인에게 푹 빠져서 그 상아 여인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결점을 보지 못한 채 그냥 같이 살았을까. 아니면 끝내 보통의 세속 여인과 같아진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떠났을까. 그리고 그 상아 여인은 나중에 살도 두툼하게 찌고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아줌마가 되지 않았을까.

피그말리온 신화는 세상의 결점 투성이인 여자들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든 여자가 더 좋다는 한 남자가 꿈을 이룬 이야기이다. 누구나 머릿속에 이상형의 모습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상형이 서로가 서로가 아니라면, 즉 너는 나의 이상형인데 나는 너의 이상형이 아니라면, 이 경우 어떤 사람들의 사랑은 깨지고 슬픈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은 그런 것을 초월해서 직접 만들어 버렸다. 이제 앞으로 생명공학이 발전하면 사람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드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 시대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이상형과 함께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경우에 겉모습은 완벽하다고 해도 속마음까지 이상적인 마음씨를 갖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란 성장하면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어떤 임의의 조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by snowall 2009. 11. 29.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