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인가 2007년에 자연대 출판부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투고한 글이다.

(기존에 썼던 글들의 짜집기성 글임.)


우리나라 수능 시험은 매년 문제를 새로 만들어서 내고 있으며, 매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는 시험이다. 어째서 매년 난이도 조절이 실패하는 걸까? 문제 내는 선생님들이 바보일까?  "명문 대학"이라고 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공부만을 해 온 애들이 전부 바보인가? 아니면 명문대학은 그런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천재나 행운아들만이 가는 곳인가? 그 본질을 파헤쳐 보기 전에, 잠시 사설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얼마 전에 겪은 일이다. 난 학교 옆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수도 요금이 나왔다고 해서 돈을 내러 갔다. 다른 요금과는 달리 수도요금은 주인집에만 계량기가 달려있고 각 자취방에서 쓰는 물값이 합쳐지므로 개별적으로 누가 얼마나 썼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 수대로 나눠서 내게 되며 나 역시 이 방법이 대체로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수도요금 체계를 가진 상황에서 각 자취방 사람들의 생각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 문제의 경우 자취방이 2명이고 수도요금을 절반씩 나눠내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예를들어, 수도요금이 10000원이 나왔다면 나는 5000원을 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저쪽이 실제로 5천원어치 이상을 썼는데 저쪽은 5천원만 내고 내가 나머지 부분을 낸다면, 이건 억울한 일 아닌가? 확실히 억울하다. 그럼 내가 억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정답 : 저쪽보다 많이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쪽이 나보다 멍청하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이제 경쟁이 시작된다. 서로 상대방보다 더 많이 써야만 내가 사용한 요금을 상대방이 내 주는 폭이 커지기 때문에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수도요금은 끝도 없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서로가 이것을 미리 생각하고, 서로 협력해서 어느정도 이상을 쓰지 않기로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까? 서로 협력하면 둘 다 같은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배신하면 배신을 한 쪽은 큰 이익을 얻고 배신 당한쪽은 손해를 본다. 그리고 둘 다 배신하면 둘 다 손해를 본다. 그리고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은 싫기 때문에 둘의 선택은 둘 다 배신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이 결과는 죄수의 딜레마의 결론으로부터 유도된다.

문제의 난이도는 어떻게 하면 적절히 조절될까? 우선 출제위원-수험생 한명 사이의 딜레마를 고려해 보자. 출제위원이 문제를 쉽게 내면 수험생의 점수는 높을 것이고 어렵게 내면 점수는 낮아진다. 출제위원의 고민은 그 사이에서 적절한 문제를 내는 것이다. 즉, 출제위원은 점수가 너무 높아도 고민이고 너무 낮아도 고민인 것이다. 예를들어, 100점 만점인 시험에서 자신이 낸 문제를 푼 학생이 50점을 받아야 자신이 낸 문제가 잘 출제된 문제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50점에서 멀어질수록 괴로워진다. 수험생은 100점에 가까울수록 좋고 멀어지면 괴롭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개념적인 이해를 해볼 수는 있다. 수험생이 0점 근처의 점수를 받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손해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는 일은 모두 막기 위해서 노력한다. 즉, 출제위원이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내는 일도 없고 수험생이 너무 공부를 안하는 경우도 없다. 이 협력은 수험생의 점수가 50점을 넘어가는 순간 깨진다. 수험생은 여전히 점수가 높을수록 좋지만 출제위원은 이제 수험생이 점수가 높아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문제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런다고 수험생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험생은 낮아지는 점수를 막기 위해서 더욱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과정이므로 수험생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문제는 어려워지고, 문제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수험생은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된다. 결국 피터지는 수험 전쟁은 단 한명의 학생이 있어도 발생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3명의 딜레마를 고려해 보자. 한명은 출제위원이고, 두명은 수험생이다. 두 학생의 평균 점수가 50점에 가까울수록 출제위원은 좋다. 두 수험생은 자신의 점수가 높을수록 좋다. 그렇다면 일이 일어날까?

두 수험생의 점수가 둘 다 50점을 넘지 않는다면 출제위원은 수험생의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수험생들은 굳이 포기하지 않는 한 적당히 공부해서 50점까지는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어느 한쪽이 50점을 넘었다면 어떻게 될까? 출제위원은 평균점수가 50점근처에 있는 한 결코 난이도를 조절하지 않을 것이다. 잘 내고 있는데 뭐하러 괜히 수고스럽게 난이도를 바꾸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두 수험생은 피말리는 경쟁을 하게 된다. 내가 쉽게 점수를 올리려면 난이도가 쉽게 나와야 하는데, 상대방이 나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점수를 올리게 된다면 난이도는 어려워진다. 그럼 나 역시 피터지게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따라서, 나만 공부하고 저쪽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평균점수는 50점에 가까울 것이므로 난 손쉽게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중요한건, 상대방 역시 바보가 아니므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가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방은 공부한다. 이제는 문제가 쉽더라도 상대방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공부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문제가 쉽건 어렵건 내가 공부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연합하는 것도 문제다. 그럼 성적이 서로 잘 올라가서 문제가 어려워지므로 공부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반대로, 서로 공부를 안하기로 연합하는 것은 어떨까? 이 경우 최소한 50점까지는 성적이 떨어질 것이므로 각자 손해다. 또한 한쪽이 배신할 경우 반대쪽은 탈락이다. 따라서 이런 연합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난이도 수준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과의 경쟁이 심해지게 된다. 심지어 문제가 어렵지 않아도 대학가기는 힘들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만약, 출제위원이 문제를 어렵게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는 평균점수가 내려가게 될 것이므로, 서로가 방해하는 시간보다는 공부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물론 공부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반대로, 출제위원이 괜히 문제를 쉽게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서로를 방해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공부하기는 상대방의 방해때문에 어렵다. 따라서, 문제가 쉽게 나오건 어렵게 나오건 대학가기는 힘들고 공부하기는 어려우며 매년 수능 난이도 조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100만명의 수험생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균형을 이뤄서 모두가 잘 되는 길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공부를 똑같이 해서 잘 되기로 합의했다면 단 한명이 배신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에 모두가 배신하고 자기 공부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수능만을 분석했지만, 수능뿐만이 아니라 수험생들이 경쟁하는 모든 종류의 시험에 같은 분석을 적용할 수 있다. 대학가기가 힘들고 수험생들이 고생하는건 대학교 입시 제도가 자주 바뀌어서도 아니고, 논술 비중이 커져서도 아니며, 학생부 위주의 선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은 무죄다. 대학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 수험생들이 고생하고, 점점 더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만 한다. 수험생들의 피터지는 경쟁은 대학에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대학 졸업장 필수"로 한정해 버린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by snowall 2009. 11. 29.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