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이제 2010년 월드컵의 조추첨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운명의 조추첨이랜다.

아...이런 비겁한.

조추첨 정도를 "운명적이다"라고 말하는 건 참 비겁하다. 조추첨에서 조가 결정되는 것은 순전히 확률에 따르는 것이고, 결국은 운에 맞춰서 결정되는 법이다. 강팀들과 편성되면 16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이고 약팀과 편성되면 본선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약팀과 편성되서 편하게 본선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겁한 것 같다.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바라며 매일매일 경기력 향상을 위해 훈련하는 감독과 선수, 스탭진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약팀과 만나서 16강, 8강 등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비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약팀을 만나기를 바라고, 실력이 성장하지는 않더라도 성적이 좋기를 바라는건 비겁하다. 차라리 탈락하더라도, 강팀이든 약팀이든 좋으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가진 실력을 아쉬움 없이 발휘할 수 있다면 좋겠다.[각주:1]

브라질이나 독일같은 팀을 보면, 그들은 어느 조에 편성되는가는 신경쓰지 않는다. 실제로 굉장한 실력을 가진 팀들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에 어느 팀을 만나든 열심히 뛸 것이고 그만큼의 결과를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태도는 본받아야 한다. 월드컵 32년 연속 본선 진출인가, 뭐 그런걸 쾌거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브라질이나 독일은 우승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렇게 운에 맡기고, 약팀과 한 조가 되면서라도 본선 진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실력을 깎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 경기의 본질은 선수들이 열심히 뛰었다는 것이고, 거기서 나타나는 승부는 그렇게 열심히 뛴 결과에 불과하다. 선의의 경쟁을 하는 운동 선수들에게 최대의 모욕은 "넌 나보다 못해"가 아니라 "나 대충 뛰었는데"가 될 것이다. 월드컵에서 약팀과 한조가 되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충 뛰고서도 16강 진출이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한가 여부는 둘째치고, 그것은 상대팀을 무시하는 일이다. 차라리 독일같은 강팀한테 대충 뛰고서 져주면 독일이 황당해 하기는 하겠지만.

방송으로 중계되는 스포츠의 본질은 결국 대리만족이다. 우리편 선수들이 승리를 하면 나도 승리한 것 같이 기쁘고, 패배하면 나도 패배한 것 처럼 슬프다. 하지만 대리만족은 대리만족일 뿐 그것이 나의 진정한 만족은 되지 않는다.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건 기원하는 것으로 끝내고, 그들이 열심히 뛰었으면 결과가 어떻든 충분히 재미있게 즐겨볼 수 있지 않을까. 축구에서 졌어도, 당신이 당신 자신의 현실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1. 물론 이 경우에도 탈락하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가진 실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겠지만. 사실 이 얘기는 국가대표팀 소속 감독, 선수 등 외에는 하면 안되는 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정말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어떻게 짐작이라도 할까? [본문으로]
by snowall 2009. 12. 5. 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