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길을 걷고자 대학원에 들어왔는데, 대량의 공부와 막막한 앞길에 그닥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이 없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 관점에서, 이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닐까? 싶은 것들이 있어서 적어본다.


1. 새로운 사실

내 분야만 해도,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의 논문이 쏟아진다. 투고된 것 말고, 통과되서 학술지에 정식으로 실리는 것들만 쳐도 수백건이 넘는다. 이 논문들을 다 읽어본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실력있는 과학자라면 이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제목과 초록만 보고 어느정도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들이 발견하고 주장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과학의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은 논문들이 쌓여서 중요한 이론이 될 테니.

물론 재미가 없어도 새로 발표되는 논문은 따라가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데, 내가 지금 하는 연구를 누군가 먼저 해서 결과를 내놓았을수도 있고, 남들이 쓴 논문에서 미처 따져보지 못한 부분이나 시도하지 않은 부분을 내가 먼저 발견해서 논문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새로운 시도

내가 붙들고 삽질하고 있는 바로 이 주제는, 누가 돈주고 시켜서 연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순수한 호기심에 연구하는 것일수도 있고, 둘 다일수도 있다. 아무튼 이 연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해져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할지 말지 정할 수 있는 일은 그 고민으로도 재미있지만 그런걸 정할 수 없이 일단 해야 하는 일은 그다지 재미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소소한 재미가 그 사이에 들어있는데,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이 고민은, 마치 로또에서 어떤 번호를 찍을까 고민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준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면 연구를 마무리짓고 털어버릴 수 있으므로 당연히 즐거울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엇을 하면 실패하는지 알게 되므로 연구에 진전은 있는 법이다.


3. 결과 분석

실험을 했다. 그래프를 그렸다. 뭐냐 이건.


대체로 실험 그래프는 직선이 좋다. 분석이 편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직선을 얻기 위해서 로그 눈금을 도입했다. 지수 눈금도 있다. 하지만 그래프가 직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그린 그래프는 자연 현상을 관찰한 그래프이다. 그렇다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존재할 것이고, 그 이론을 찾아내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실험 결과는 그냥 종이에 찍은 점일 뿐이다. 실험으로 그린 그래프와 이론으로 그래프가 일치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 두 그래프가 일치하는 경우는 오직 올바른 이론을 선택한 경우일 뿐이다.

바로 그 느낌이 나를 공부하도록 만든다. 내가 얻은 실험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이론을 내가 알고 있기를 바라며.


4. 새로운 제안

물론 이론은 실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태어났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이론의 발전이 너무 빨라서 아직 실험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이론은 실험을 제안할 수 있다. 과학에서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록 소수지만,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실험 방법을 제안할 수 있다. 이 실험 방법은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허황되어 헛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런식으로 만들어진 실험 장치가 그 유명한 대형 강입자 충돌장치(Large Hadron Collider)아니겠는가.
이론가의 실력이 그 극한에 다다르면, 실험이 쫒아오기 전에 선도적으로 이론의 검증방법을 제안할 수 있다. 이 경우, 정말 자기 맘대로 실험을 제안할 수 있다. 이 이론이 틀릴까봐 겁낼 필요가 없는것이다.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기 이론을 마음껏 펼칠 때의 그 즐거움은, 음악가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화가들이 붓을 놀릴 때의 그 재미와 비슷하다.


5. 격렬한 토론

니 이론이 맞는건지 내 이론이 맞는건지 격렬하게 싸운다. 심판은 실험 결과. 어떤 이론이 더 정확하게 실험 결과를 맞추는지. 그렇게 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나는 더 정확한 이론을 알아야 하고, 남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론도 상세히 공부해야 한다. 각 이론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이론의 요점을 이해해서 실험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는지, 설명하지 못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토론은 동료 연구자들과도 이루어지고,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와도 이루어지고, 가끔 다른 분야의 학자와도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설득시켜가며 얻는 즐거움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들으며 아이디어와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도 있다.

내 이론이 맞으면 가장 재미있지만, 내 이론이 맞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이론을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다.


음... 그러나 이렇게 미화시키더라도, 어쨌든 실력있는 과학자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 삽질일 뿐이다.


정직은 과학자의 기본이고, 실력은 과학자의 미덕이다.

by snowall 2013. 8. 30. 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