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수님이랑 얘기하다가 내 진로에 관한 문제가 도마 위에 올라왔다. 대략 느낌은 도마위의 횟감이랄까.

잠시 내 이력을 소개하자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는 큰 길(4차선과 8차선 도로)을 3번 건너는 한수중학교 대신 작은 길(2차선)을 1번 건너면 되는 오마중학교로 진학했다. 그것도 교육청가서 투쟁한 결과로 얻어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는 동네에 있는 한 10개 정도의 고등학교 중에서 서열상 3번째 하는 주엽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이유는 앞에 두 학교는 가려면 못갈것도 없지만 통학거리가 버스로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주엽고등학교는 걸어서 5분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중앙대학교는 수시모집에 합격해 버려서 연대나 고대나 좀 더 높여서 서울대를 가라는 담임선생님이랑 좀 싸우고 중앙대에 굳이 등록을 했다. 왜냐하면 수능을 볼 경우 합격할지 어떨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확실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이때 수능을 봤다면 중앙대도 못 오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재수를 해야 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 시간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또한 내년부터 군대에 현역으로 입대하는 대신 병역특례업체에서 돈 많이 받으면서 일하게 되었다. 당연히 남들보다 쉬운 길이다. 오직 집에서 30분 걸린다는 이유로 연세대에 가고 싶긴 했지만, 못갔으면 어떤가.

교수님이 내게 제기한 문제는, 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부분이다. 즉, 잘 하는 사람들 옆에 있어야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도 열심히 하지 않는 애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대학교 와서도 열심히 하지 않는 애들만 본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교수님에게 내가 느낀 것은 은근히 연세대가 더 좋은 학교이고 우리학교가 비교적 좋지 않은 학교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연대 학생들은 더 열심히, 더 실력있는 학생들이고 우리학교 학생들은 비교적 덜 노력하고 적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같이 공부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수능 점수가 좀 낮게 나와서 중앙대에 오긴 했지만 머리가 나빠서 노력해도 실력이 안쌓이는 사람은 없더라. 즉, 자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실력을 쌓지 못하는 경우는 봤지만 대부분은 노력한만큼이나 그 이상의 실력을 만들어 나갔다. 연세대와 비교해서 그다지 밀릴 것이 없다.

내가 연세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오직 가까워서이지 명문이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이 연세대를 비하하는 뜻은 또한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교수님이 내게 가지는 불만은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만 살려고 한다는 점인데 난 그게 좋다. 쉽게 살고 싶다. 피할 수 없는 고생이야 당연히 이겨내야겠지만, 사서 고생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대학교 와서 세운 인생 전체의 계획은 대략 20년치다. 지금까지, 즉 지난 6년간은 계획대로 잘 가고 있다. 앞으로 3년도 잘 될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에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다. 공짜로 얻을 생각도 없고, 노력하지 않을 것도 아니다. 단지 쉽게 해보겠다는 것이다. 난 내가 가진 능력과 열정을 물리 공부 이외의 것에 쏟아붓고 싶지 않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도 오직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이고, 대학을 다닌 것도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나를 키워줄 충분한 실력을 가진 선생님이 있는 곳에서 공부하면 됐을 뿐, 최고의 선생님 밑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건 없다. 그건 단지 나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지만, 난 나보다 성실하고 노력하며 머리까지도 좋은 사람들이 의대와 법대를 가는 대한민국이 너무너무 좋다. 진짜로. 그런 사람들이 물리학과로 몰려왔다면 아마 난 파묻혔겠지. 다행히도 물리학과는 천재만 다닌다는 인식이 있고 취직이 안된다는 편견이 있어서 그렇게 몰려오지는 않는다. 사실 천재 아니라도 물리 잘할 수 있고 취직도 꽤 잘되는데 말이다. 나보다 공부 못한 친구들이 모두들 남들이 바라마지 않는 삼성, 현대, 동부 등등의 대기업 계열사에 취직했다. 아니면 포항공대, 카이스트, 서울대 등 유명한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 대학원 가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잘 다니고 있다. 이 상황에서 왜 그보다 공부를 잘했던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상 쉽게 산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뭐, 조금 억울했다는 것이다.
by snowall 2007.11.07 11:08
  • Rainyvale 2007.11.07 14:52 신고 ADDR EDIT/DEL REPLY

    저와 비슷한 면이 좀 있네요. 항상 '적당주의'를 부르짖는 사람이라... 저도 유학갈때 장학금도 보장해 주는, 좀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갔는데요, 그래서인지 참 편히 지냈어요. 인생의 황금기 중 하나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성적 잘 받고 교수님과도 잘 지내고 논문도 이 분야 치고는 많이 내고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좀 후회합니다. 경쟁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쟎아요. 그 때는 내가 적당히 할 수 있는 곳까지만 해 본 것일 뿐이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환경에서 좀 있어 보는 것도 괜챦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한계는 자신도 모르거든요. 자신의 의지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은 하기가 어려운 것 같고, 바깥으로부터 푸쉬당하는 것도 한번쯤 해볼만 할 것 같아요.

    80년대 후반과 90년 초반 학번 이공계는 자체 경쟁이 좀 고달픈 것 같아요. 그 때는 "성실하고 노력하며 머리까지도 좋은 사람들이 의대와 법대를 가는 대한민국"이 아니었으니까요. "의대가기엔 점수가 너무 아깝지 않아?"라는 농담이 있던 시절이라... ㅋㅋㅋ

    • snowall 2007.11.07 14:55 신고 EDIT/DEL

      유학갈때는 장학금 안주면 못가요. 집안 형편상...
      어디에 있든, 자신은 항상 자신과 함께하니까 원한다면 자신과의 경쟁은 항상 가능합니다. 이기든, 지든.
      유학 가서부터는, 진짜로 제대로 된 경쟁이 시작되겠죠. 그때야말로 인생을 전부 걸고 해야 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