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랑 내 졸업논문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나왔다. 꽤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거지만, 교수님이랑 토론을 하고 있다보면 연구 의욕이 절반씩 깎여나간다. 다행인 것은 지수함수적인 감소라서 0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 내 졸업논문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아주 졸작이다.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졸작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졸작은 졸업작품의 줄인말이 아니다. 오늘 토론하는데 교수님이 "넌 왜 영어로 써서 너 스스로도 논리 흐름을 놓치냐"라고 하셨다. 옳은 말씀이다. 백만번 되새겨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난 영어를 못한다. 근데 저 말을 들을 때의 내 감정은 상당히 속이 쓰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저런 말을 한두번 듣는게 아니라 석사 2학기부터 1년 반째 듣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나에 대해 생각해 주시는 것과 뛰어난 과학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건 지난 2년간 석사 생활하면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교수님이랑 토론을 하다보면 연구 의욕이 반토막 나는건 내 감정 상태일 뿐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서 느낀 건데, 이 원인은 분명 연구 과정에서 그냥 건너뛰어버린 논문의 논리적 결함 때문이다. 그건 내가 직접 계산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 얘기를 교수님께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결국 그 결함이 문제가 없다는 교수님의 생각을 고칠 수 없었다. 거기서 시작된 내 양심의 가책이랄까, 그런 것이 점점 증폭되어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것 같다. 정확히는, 그 순간 "이건 과학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부터 흥미가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을 내 감정적으로는 교수님께 떠넘기고 난 그냥 교수님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이미 이 연구가 나의 과제라는 책임감이 생긴 마당에 그냥 넘어가는건 그다지 옳다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사실 지금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졸업 논문 끝나고 나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평생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다. 입자물리학 말고 고체물리나 플라즈마같은 다른 주제를 하고 싶어지고, 입자물리를 하더라도 중성미자 물리학에 손을 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빨리 다른걸 하고 싶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교수님이 나한테 칭찬 한마디만 해 주셨으면 내 대학원 생활이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섣부른 칭찬은 독이고 빗나간 자만심은 자살행위다. 내가 칭찬받을만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대충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랬었던 것이 단 한마디의 칭찬이었다고 본다. 물론 이 얘기를 교수님께 직접 할 수는 없었는데,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결국 교수님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지 못했고, 그 관점에 따라 나는 별로인 학생이 되었고, 그에 따라 별로인 학생에게 칭찬이 오지 않는지라 나는 더욱 별볼일 없는 학생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교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 앞에서 대놓고 내 욕을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다른 그룹의 사람들의 평가가 대부분 일치하는 것을 보면 나는 분명 꽤 괜찮은 인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교수님의 평가가 진짜이고 나는 그저 내 주변의 거품에 둘러싸인채 자만과 허영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을 뿐일까? 어느쪽이든, 내가 대학원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견뎌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나 자신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어도 좋고, 교수님이랑 나랑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어도 좋다. 어쨌거나 대학원에 있었던 2년간의 생활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괴로운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으로 난 그냥 나 자신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물리학을 좋아하고 있는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던진다. 다른 선배들도 나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대단한 놈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이렇게 긍정해도 되는 걸까?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대학원에 들어와서 매일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번 했었고, 그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질 때마다 매번 이대로 버텨보자는 대답을 수백번 되새겼었다. 초등학교때 꿈꿨던 "과학자"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이제 12년정도 지나왔다.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결국 세상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은 멋진걸? 근데 그게 아니다. 이것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또다른 가치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가장 가치있는 것을 포기한다면 난 그것들을 어째서 포기했던 것일까. 유학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추천서와 연구 경험을 얻기 위해서 들어왔고, 이제 그것들이 완성되어 간다. 어떻게든 버티고 나면, 그리고 몇년 후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 그때 교수님께서 내게 그럭저럭 괜찮은 추천서를 써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다른데 가서 추천서 구할 곳도 없다. 더 잘할 수도 있었던 2년의 대학원 생활을 이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어떻게든 끝이 난다. 물론 내가 감당했던 정신적 고통이 일방적으로 교수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내가 게을러져서 맨날 놀기만 했던 것도 있고, 그 덕에 교수님께서 시킨 일이 제때 진행되지 않았던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럭저럭 했는데. 교수님께서 언제까지 해 오라고 시키셨던 일들은 정해진 날짜까지 거의 대부분 해냈었다. 막판에 졸업 논문 쓰는게 꼬여서 그렇지, 그다지 일을 못한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는 꽤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이상, 이 글은 나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자기변명이었다. 며칠째 밤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쌓이는건 나나 교수님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금 더 해볼까.

그건 그렇고, 교수님이랑 마주앉아서 며칠 밤샌 퀭한 눈으로 보고 있으면 왜 교수님은 "너 술마셨니?"라고 물어보실까. -_-; 하아...이게 제일 힘들다.
by snowall 2007. 12. 10.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