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학로에 오락실이 있어 거기를 자주 가는 편이다.

오늘도 열심히 오락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돌아오는데, 지하철 역 앞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저기요, 저는 사람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제조건
1. 남자다.


단 하나의 편견으로 일단 마음의 장벽(AT-Field)을 펼치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이런 종류의 얘기는 진지하게 맞받아쳐주는 사람이므로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서, 잠시만 시간을 내셔서 ..."
뭐, 뻔한 레퍼토리라 -_-; 그래서, 나름 진지한척하면서 장난삼아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호흡이 뭔지는 아시죠?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입니다. 제가 벌써 숨쉰지 25년째인데, 이제 조금씩 세상의 공기 맛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25년이나 숨을 쉬었더니 좋은 공기와 나쁜 공기가 무슨 맛인지 알것 같고, 어떤 사람이 내쉬는 숨이 좋은 공기인지 나쁜 공기인지 판단할 것 같네요. 그쪽도 숨 오래 쉬셨죠? 얼마나 숨쉬어봤어요?"
"아...그러세요. 저도 한 20년 조금 넘게 숨쉬었는데요"
난 이 시점에서 이 사람이 그다지 공부가 깊지 않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내 말의 요지는 "난 25살인데 넌 몇살이냐?
"를 굉장히 우회적으로 얘기한 건데 그다지 파악을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더욱 질러주었다.
"사람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셨으면, 노자나 장자는 읽어보셨나요? 성경은? 논어, 맹자는? 소크라테스는 보셨어요? 피타고라스는 아시나요?"
"하나도 안 읽어봤는데요"
"그럼 지금 공부하는 책은 뭔가요?"
"그냥 뭐...지침서 같은건데요"
"그럼 그 책은 100년 넘었나요?"
"아니요..."

물론, 난 여기서 책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언제 쓰여졌느냐 하는 아주 사변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 사람을 공부한다고 하면, 지난 수천년간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인정한 책들을 공부하는게 더 낫지 않겠어요? 최소한, 그 책이 정말 진리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이 다 괜찮다고 하는데는 뭔가 있지 않을까요?"
"네, 뭐, 그렇겠죠"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책은 몇권이나 읽어봤어요? 한 1000권은 읽으셨나요?"

슬슬 내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사실 나도 요새 정신적으로 피폐해진터라 좀 막장이다.

"한 그정도는 읽었겠죠"
"그럼 그중에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이 뭔가요?"
"삼국지요"
"그럼 그 책에서 뭘 배우셨나요?"
"의리...일까요?"
"의리는 삼국지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그건 나관중이 유비를 부각시키느라 삼국지가 그렇게 쓰여진 것이죠. 사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저 세상과 타협한 사람들이예요. 누구든지 세상과 타협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죠. 그럼, 사람공부를 한다고 하셨으면, 얼마나 공부하셨어요?"
"저는 이제 초입이라 6개월 조금 안됐어요"

허허허...이제 겨우 6개월 공부한 사람을 길거리로 내보내다니. 이쪽도 막장이구먼.

"그럼, 스승님께 가셔서 제 얘기를 한번 물어보세요. 제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게 제가 요점을 잘 모르겠는데요..."

뭐, 그래서 대강 25년간 숨쉬는 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parapharase해주고 인사하고 왔다.

이 얘기를 왜 쓰느냐.

사람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더라. 사람을 공부한다면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주의 가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운을 타서 잘 준비해야 사람이 잘 된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궤변일까. 힘든 일일 뿐이다.
by snowall 2008. 2. 9. 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