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철이다보니 요새 대학원 모집 요강을 살펴보는 중이다. 그러다가, 카이스트 대학원 모집 요강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다음 9가지 지정항목에 대해서는 해당란에 요약하되, 각각의 해당란마다 3줄까지, 공백포함 한글 약 135자 내외로 입력 가능합니다." 1. 대학 특별활동 사례 2. 리더십 활동 사례 3 수상경력 4 특기 및 자격증 5 과거 이수과목중 관심과목 6 희망 전공분야 및 연구주제 7 장래계획 8 지원동기 9 2지망 지원동기 및 연구계획.

카이스트 2013년 전기 모집요강.


입학 원서가 트위터냐. 페르마 드립을 칠까보다.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모두 적지 못함."

by snowall 2012. 7. 5. 00:43

tvN의 SNL을 봤다. 약빨고 만든 프로그램같다. 진짜 웃기다. 이것도 아무래도 챙겨봐야 하는 프로그램 같은데, 과연 내가 토요일 밤에 시간이 될 것인가...-_-


by snowall 2012. 7. 2. 02:10

과학자들의 로망, 낭만, 꿈, 그 무엇! 바로 시간여행. 영화 "백 투더 퓨처"를 보면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자기 아빠를 만납니다. 그런데, 자기 엄마가 자기를 좋아하게 되어 버려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위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찌질이 아빠를 엄마랑 엮어주기 위해서 갖은 삽질을 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죠. 안타깝게도 제 아들놈은 미래에서 날아오지를 않네요. 이자식...


그 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은 수많은 문제와 역설을 만들어 냅니다. 그중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사람이 자신을 죽여버리는 경우입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1. 그러므로 시간여행은 말도 안된다. 2. 자기 자신을 죽인 그 순간 우주가 평행우주로 갈라진다. 3. 자기를 죽인 순간 자신도 없어진다. 4. 뭔 개소리냐.


어 떤 해석이 맞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건 타임머신을 개발한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저는 앞에서 지금까지 썼던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가서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동시간대에 자신이 둘 존재하는 경우이고, 따라서 "나의 복사" 문제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 에서 얘기한 3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매우 오묘하게 되는데요, 여러 해석 중에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변한다는 3번 해석을 채택 해 봅니다. 그럼, 일단 과거의 나는 미래에서 온 나를 만났어요. 그럼 과거의 나의 관점에서는 또다른 나를 만난 거예요. 그럼 그것을 "나"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아마 잘 안될 겁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나"로 인식하는 것은 현재의 [현상]이지 과거나 미래와는 상관이 없어요. 즉, 지금 이 순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관점이지 보편적인 생각이나 인정받는 주장은 아닙니다. 과거의 나의 관점에서는 아무리봐도 미래에서 온 나는 타인으로 간주됩니다. 미래에서 온 나의 몸을 내가 맘대로 조종할 수도 없고, 미래에서 온 내가 아파한다고 해서 현재의 내가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요.


미 래에서 온 나 역시 과거의 나를 "나"의 일부나 그 자체로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과거의 내가 아파한다고 해서, 아팠던 기억은 남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아프지는 않을테니까요. 물론 과거의 내가 느끼는 생각이 그대로 자신의 "옛 추억"에 떠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환상 같은 것이지 현재 느끼고 있는 "나"라는 인식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세간의 인기를 잠깐 끌었던 화제의 소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아무도 눈치 못채게 등장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름 외계인 나가토 유키는, 사실 정보 생명체인데, 뭐 어쨌거나 시공간을 넘어온 자신에 대해서 미래에서 왔든 과거에서 왔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존재입니다. 이 아가씨의 경우는 존재 자체가 특이한 경우라서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시공간을 넘어온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상상 많이 하잖아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가장 알려주고 싶은 미래의 진실. 로또번호.


그런거, 과연 말해준다면, 나는 그 말을 믿고 자신을 바꿔나갈까요?


by snowall 2012. 7. 1. 03:12

방금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4대강 사업의 성과에 대해 두 교수가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1. 가뭄

4대강에 친화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으로 가뭄이 많이 해소되었다"고 주장하자

4대강에 비판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으로 가뭄이 해갈이 안된다"고 반론을 폈다. '지금 논바닥 갈라진거 안 보이느냐'라면서.

그러자 친화적인 교수가 "4대강에 가까운 곳은 많이 해소되었다"고 주장했고

여기에 비판적인 교수는 "4대강에서 먼 곳은 해소되지 않았고, 가까운 곳도 취수시설이 없으면 해소되지 않았다"라고 반론을 폈다.

이에, 친화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은 가뭄과 홍수 중에 홍수 피해 예방에 더 중점을 둔 사업이다"라고 주제를 바꾸었고

다시, 비판적인 교수는 "4대강 사업 홍보물과 대통령 발언 중에 가뭄이 해갈된다고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라고 틀어 막았다.


2. 홍수

4대강에 친화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으로 홍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4대강에 비판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은 하류에 물을 가두는데, 치수 사업을 그렇게 하는 예는 동서고금에 없다"고 반격했다.

그러자 친화적인 교수가 "우리나라는 특정 시기에 비가 집중되기 때문에, 이 때 물을 모아두었다가 가뭄때 써야 한다"고 반론을 펴고

여기에 비판적인 교수는 "독일에서 하류에 물을 막아두었는데, 매년 농경지를 침수시키고 보상해주고 있다. 그것이 홍수 예방이냐"라고 반문하여

친화적인 교수가 "큰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서 더 크게 물을 가둘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니

비판적인 교수는 "지금 가뭄 때문에 물을 막아 두었는데, 큰 홍수를 대비하려면 미리 물을 빼놔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친화적인 교수는 "가뭄 때문에 물을 모아 두었지만, 비가 올 것 같으면 그때 가서 물을 빼면 된다"고 주장하니

그래서 비판적인 교수가 "비가 내릴 때 물을 빼는데, 흘러간 물이 강에서 하류까지 가는데 1주일은 걸린다. 너무 늦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친화적인 교수가 "가뭄 때문에 물을 모아둘 필요가 있다"라고 반론하니

여기에 비판적인 교수는 "아깐 4대강 사업이 가뭄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더니"라고 지적했다.


3. 녹조

4대강에 비판적인 교수가 "4대강 사업때문에 낙동강 녹조가 늘어났다"고 주장하자

4대강에 친화적인 교수가 "녹조는 이전부터 있었고, 4대강 사업은 그 녹조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비판적인 교수가 "무슨소리냐. 이전부터 있었고 늘어난 것이 맞다"고 꺾어주었다.

여기에 친화적인 교수는 "녹조는 4대강 때문에 늘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받아치니

비판적인 교수는 "물을 가두었기 때문에 늘어난 것이다"라고 반론을 펴고

친화적인 교수가 "녹조의 성장은 가둔 물 뿐만 아니라 수온과 부영양화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물이 늘어나서 수온이 줄어들었다"고 막았다.

이것을 비판적인 교수가 "물이 늘어났어도 물이 흐르지 않으니 녹조가 주로 자라나는 표층의 수온은 올라간다"고 뚫는다.


두분토론 이래 이렇게 웃긴 토론은 처음이었다.

by snowall 2012. 6. 27. 14:20

들어가기에 앞서. 빨갛다 님이 이전에 댓글 달았던 내용 중,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있다는, 즉 심신이원론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고활동의 교환뿐만이 아닌, 정신세계 전체에 대한 혼재된 상태를 상상했었기 때문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쉬운 문제는 아니므로 일단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어물쩡 넘어갈 생각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뇌 안에 있는가 없는가, 자아는 뇌의 활동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상위의 어떤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는 일단 덮어두고, 지극히 기계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해 보려고 한다.
법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 기술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자. 사람 몸에는 손에서 뇌로 가는 감각 신경이 있다. 어떤 사람의 팔뚝을 지나가는 신경 줄기를 따내서, 마치 전선 잇듯이 이어붙인 다음, 이 "전선"을 다른 사람의 팔뚝의 같은 부위에 접속한다고 가정하자. 이 전선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손에서 느끼는 감각을 접속받은 사람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것이 없다.
이번엔 이 실험을 척수에 대해서 해 본다고 하자. 어떤 사람의 척수 아래에서 온 신호를 따내서, 다른 사람의 척수 위로 신호를 넣어준다면, 이 사람은 저쪽 몸에서 온 신경 신호를 마치 자신의 몸인 것 처럼, 뭔가 어색하지만 느낄 수 있다. 만약, 척수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는 운동신호를 전송한다면 멀리 있는 몸이라도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좌뇌와 우뇌는 뇌량이라는 조직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뇌량은 마치 네트워크 허브(=>공유기) 같은 존재인데, 자세한 설명은 뇌 전문가에게 듣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냥 좌뇌와 우뇌의 정보를 전달해주는 중간 계층이라고 하자. 뇌량이 손상되거나, 또는 치료 목적으로 절제한 경우, 그 사람은 좌뇌와 우뇌가 따로 놀게 된다. 즉, 왼쪽으로 본 어떤 사실을 오른쪽 뇌가 말로 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사례를 살펴볼 때, 인간의 인식 과정에는 "연결"이라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뇌의 어느 한 일부분만을 살펴본다면 아무리 살펴보아도 정신, 마음, 자아,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뇌 전체를 살펴본다면 그제서야 실제로 살아있는, 생각하는 어떤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방금 알아보았듯, 뇌량에 의해서 좌뇌와 우뇌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양쪽 뇌가 협동하여 몸을 조종할 수 있다. 또한, 두개의 뇌는, 알다시피, 그리고 느끼고 있다시피, 하나의 인격(정신, 자아, 심리, 뭐 그런 것들)을 구성한다. 그럼 이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좌뇌를 서로 바꾸어 이식한다면? 즉, 이 사람의 좌뇌를 저 사람의 좌뇌와 바꾸고 뇌량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럼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윤리적으로 명백히 문제가 있는 실험이고, 기법상으로도 매우 곤란한 수술이기 때문에 실제로 해 볼 수는 없겠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과연 그렇게 재조합된 뇌는 서로를, 또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할까? 


인터넷에 떠도는 뇌의 역할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 http://2proo.net/950 )
좌 뇌는 언어적 기능을 잘 하고, 언어로 기억한다고 한다. 우뇌는 감각적이고 비언어적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럼, A의 좌뇌에 B의 우뇌를 합친다면, 일단 기억은 둘 다 반반씩 갖고 있을 것인데, 가령 B가 경험한 일들을 A의 사투리로 말할 것이다. 뇌량에 의해서 양쪽의 뇌가 서로 정보교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자기가 A였던 기억도 있고 B였던 기억도 있는, 둘 다 생생한 실재로 느껴지는 인간이 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팔을 지나가는 신경에 마취가 되어 있는 경우, 나의 팔은 내 몸에 붙어는 있지만 나의 팔이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눈에는 보이지만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도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이 상태에서 수술을 하게 된다. 물론 대체로 큰 수술은 전신마취를 하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수술을 자신이 직접 보면서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종합해 보면, 자신의 몸을 결정하는 것은 물리적인 연결상태가 아니라 감각과 조작 가능성이다. 즉, 감각적으로 느껴져야 하고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틀어 앞에서 말한 "연결"이란 이런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느껴지고 조작할 수 있다면 몸이 굳이 한개만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러개의 몸을 동시에 인식하며 경험하고 뜻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몸이 1개이기 때문에 몸이 여러개가 되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편견일 뿐, 그 본인(또는 본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인간은 손이 2개 밖에 없기 때문에, 손이 4개가 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곤충들은 그런 상황이 매우 자연스럽고, 심지어 거미는 8개나 되는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돌아다닌다. 만약 인간에게 처음부터 손이 4개였다면 아주 당연하게 4개를 모두 사용해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키보드에 지금보다 단추 수가 두배는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200개쯤?

몸이 여러개 있는 상황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지만, 이미 그런 여러개의 몸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또는 어떤 적당한 수단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경우라면, 작업 효율이 2배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여친은 없겠...


이 제, 맨 처음의 논의로 되돌아가자. 나의 복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자.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랑 똑같이 생긴 인간이 하나 있다. 여기에, 지금까지 논의한 적절한 시술을 해서 몸 두개를 동시에 나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하자. 두 몸은 각각 뇌를 갖고 있지만, 원격 통신장치를 사용해서 모든 기억과 사고를 공유하고, 심지어 자신의 뇌가 두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원본"이었던 몸과 "사본"이었던 몸 중, 어느 한쪽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절단"에 가까울 것이다. 즉, 아프긴 하겠지만 사망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 기술을 응용하면 계속해서 복제 인간을 만들고 자신과 동기화 시킴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복제인간을 만들었으나 위와 같은 기술이 없어서 복제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하자. 복제인간에게는 나의 모든 기억과 사고방식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나와 복제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느낄 수 없다고 하자. 이 경우, 원본이 죽든 사본이 죽든 타인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원본도, 사본도, 각자의 자아를 가진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가게 되므로 사본이 있다고 해서 원본이 죽을 수는 없다. 


by snowall 2012. 6. 25.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