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차별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것 같다. 뭐, 소수자 차별 자체가 굉장히 뿌리가 깊기도 하고, "나는 다수자에 속하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해할까봐 미리 붙여두지만, 여기에서 말한 "상식"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경우에 한해서 도덕적이나 사회규범적으로 옳다/그르다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최근, 어떤 과학 사이트에서 "신체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생활 속에서 시설물을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고안하라!"라는 문제를 보았다. 여기에 달려있는 아이들(초등,중학생)의 답을 보게 되었는데, 창의력을 요구하는 문제치고 아이들의 답이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았다. 기존에 이미 있는 것들의 답습이거나 아이디어 자체가 너무 차별적인 요소가 있었다.

예를들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에스컬레이터를 무빙워크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계단이 움직이는 것이고, 무빙워크는 계단이 없이 경사면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빙워크는 휠체어가 올라갈 수는 있지만 휠체어 바퀴를 고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미끄러진다. 이에 대해서 고정을 한다거나 로봇 손을 이용한다거나 하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그 경우 탈 때도 문제고 내릴 때도 문제다. 고정을 풀어주는게 늦으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뒤에서는 계속 오는데 앞에서 못 나가고 있으면 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마트같은 곳에 설치된 무빙워크는 쇼핑 카트 바퀴가 홈에 걸려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고, 유모차 등 다른 바퀴달린 것들은 특별한 주의를 요구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로봇 팔이나 로봇 다리를 달아주는 것도 괜찮지만, 이건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았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의 경우 키가 낮아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흔히 쓰는 사물들은 높이가 너무 높다. 여기에 대해서 그런 사물들의 높이를 낮추는 아이디어가 제안되었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낮아진 높이때문에 불편해 진다. 또는 높은 높이와 낮은 높이의 두가지 사물을 설치해야 하니까 비용이 든다. 그보다는, 투자비용이 있더라도 휠체어 자체의 높이를 높일 수 있는 장치를 설계해서 휠체어에 붙이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진짜로 장애인에게 편리하다면,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편리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전용"이란 말은 불필요한 수사다. 마찬가지로 "비 장애인 전용" 역시 필요치 않다.

물론 나라고 해서 머릿속에 박혀 있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눈이 없다고 상상하고 길을 걷다보면 의외로 길거리는 위험하다. 얼마나 위험한가 "체험" 해보고 싶다면,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10미터만 전진해 보면 된다. 집 안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방금 죽을 뻔 했다.

공공디자인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점에 있어서 버스 전용 중앙 차로제도는 쓰레기같은 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 제도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경제적인 측면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익은 상당히 크다. 나 또한 빨라진 버스 운행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쨌든 버스를 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차도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애가 없는 사람에게도 위험해질텐데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여러가지로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영화관의 좌석을 보자. 이 좌석은 사실 굉장히 좁게 붙어 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도 지나갈 때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지나가야 한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극장을 이용하는 것은 더더욱 불편하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극장에 올때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정도로는 양해할 수 없는 불편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허용되는가? 그건 당연히 아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좌석 자체가 너무 붙어있기 때문이고, 좌석의 간격을 벌려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지정된 자석에 앉고 싶은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누군가는 영화관 직원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몸이 불편하거나 불편하지 않거나 상관 없이 그냥 어떤 사람일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휠체어 전용석을 마련해서 장애인들이 그곳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곳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다. 장애인들이 S석에 앉아서 공연을 보고 싶다면? S석 중에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극장이 있는가 모르겠다. (조사해 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모른다. 혹시 그런 곳을 알고 있으신 분은 제보해 주시면 글을 갱신하도록 하겠다.)

덧붙여서 오픈웹 운동을 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오픈웹 운동은 "인터넷 웹 사이트는 표준을 지켜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고, 일단 그중의 하나로 인터넷 뱅킹의 표준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표준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불편한가? 많은 사람이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 또는 다른 어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불편할 것이다. 표준을 지킨다면 사람들이 불편한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된다. 물론 표준을 지킨다고 해서 웹 사이트 이용이 불편한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표준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았거나 불편한 경우이고, 표준을 좀 더 개선해야 할 것이다. 표준을 지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편리할 수 있으며, 더욱이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개발 비용도 사실상 줄어들게 되며 고객이 늘어나므로 오히려 이득이 된다. 우리나라는 "플래시와 자바스크립트와 액티브액스가 없으면 사람들이 화려함을 못 느끼게 되고, 웹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웹 사이트 관리자들을 고용하는 고용주) 많은 것 같다. 오히려 화려함엔 질려버렸고, 담백하고 단순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구글이 왜 성장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강하다. 언제나 자신은 "다수파"에 들어가고 싶어하며, "소수파"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배척한다. (무의식중에라도.) 생각해 보면, 한국 사람은 전 세계인에 비해서 언제나 소수파이고, 한국 사람을 한국 안에 사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다수파"에 해당한다. 결국은 자기 편한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위대한 도전정신" 뭐 이런 글귀를 좋아하지 않는다. 헬렌 켈러는 위대하다. 하지만 나는 그 위대함이 장애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해낸 업적이 위대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본다.
http://ko.wikipedia.org/wiki/%ED%97%AC%EB%A0%8C_%EC%BC%88%EB%9F%AC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야, 저런 사람도 하는데 넌 뭐하냐? 힘내라"라는 말도 틀렸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건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이건 열심히 사는건 당연한 일이다. 장애를 갖고 있다고 포기하거나 낙후된 삶을 살 거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이다.

요즘은 그래도 세상이 좋아졌는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소아마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이 사람들도 각자의 목적을 갖고 어딘가 가고 있겠지.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저 사람은 걷는 방법이 특이하군"이라고 생각한다. "불쌍하다"라든가 "난 저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하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고 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그저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움은 그다지 어렵거나 큰게 아니다. 위대한 것도 아니다.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쉬운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참고로, 장애인들이 언제나 착한 마음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장애인 중에도 나쁜놈 많다. -_-;
by snowall 2009. 8. 12.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