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어느 피라니아에 관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피라니아는 사나운 물고기인데, 수조에 가둬놓고, 수조의 반쪽을 유리판으로 막아서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면, 피라니아는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수백번씩 유리판에 부딪치다가 결국 포기하고, 그 다음엔 유리판이 없더라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더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한계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며 자신이 정한 한계에 막혀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비슷한 다른 예로, 코끼리 이야기가 있다. 서커스단에서는 코끼리를 어릴때부터 쇠사슬에 묶어서 기르는데, 쇠사슬은 어릴 때는 코끼리의 힘으로 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묶여서 자란 코끼리는, 다 커서 쇠사슬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도 쇠사슬을 끊으려고도 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의 교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정한 한계에 얽매여서, 노력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건 아닌가,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이야기다.

뭐, 멋진 이야기다.

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다. 처음부터 한계를 모르게 했더라면, 피라니아나 코끼리는 자유롭게 다녔을 것이다. 처음부터 묶어놓고 막아놓은 놈이 나쁜 놈이다. 이런 얘기를 하려면 좌절시키지 말았어야 한다. 더 적절한 예는, 유리판으로 막은적도 없는데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는 피라니아나, 쇠사슬로 묶은적도 없는데 도망가지 못하는 코끼리를 예로 들었어야 한다.

관점의 전환? 그것이 상상이라도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시켜라. 좌절부터 시켜놓고 "포기하지마~"라고 말하는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by snowall 2009. 8. 15. 1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