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험기간의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1.
해석학 시간이었다. 해석학은 미분적분학을 좀 더 제대로 배우는 과목인데, 고등학교때 배운 미분과 적분은 그냥 공식 외워서 기계적으로 푸는 산수에 해당하고, 대학교 1학년때 배우는 미분과 적분은 해석학을 조금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과목이다. 그 난이도는, 음, 문과를 선택한 완전 평범한 고등학교 신입생이 수학2의 적분 문제를 풀기 위해서 수학의 정석 실력편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의 느낌이라고 하면 조금 이해가 가려나. 100점 만점에 평균 5점 정도 나오는 과목이다. 해석학 시간에는 교수님이 들어와서 문제지를 나눠주고 5개 정도의 문제를 하나씩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거의 30분정도는 강의를 듣는 느낌이다. 정말 친절하게, 문제를 푸는 방법을 거의 다 설명해 준다. 문제를 설명해주신 후에, "질문 있어요?"라고 물어보시는데, 아무도 질문이 없다. 아무도 문제 또는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이해한 사람들은 질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과목의 특징은, 수학 교사가 되기 위해서 문과 또는 다른 학과에서 교직이수하러 듣는 학생들이 바글바글 하기 때문에 강의실이 가득 찬다는 점인데, 시험때에도 반을 나누지 않고 한 강의실에서 모두 시험을 본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부정행위가 존재할 수 없는데, 일단 앞, 뒤, 좌, 우, 어디를 봐도 백지이기 때문이다. 훤히 보이지만 베낄 수 없다.(0글자를 베껴 적어봐야 0글자다.) 간혹, 운이 좋은 경우 옆자리에 엄청난 속도로 답을 작성하고 있는 친구가 있을 수 있지만, 베껴봐야 0점이다. 일단 그 답이 정답인지 알 수 없고 (정답이 아니면 0점) 정답이라 해도 두 답이 똑같으면 부정행위이므로 0점이고, 그 답을 읽고 이해한 후 자신만의 언어로 새로 풀어 쓸 수 있을 실력이면 베낄 필요 없이 그냥 아는대로 쓰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나갈 때 가끔 친절한 교수님들은 책을 봐도 된다고 하신다. "책에 답이 있는 것 같으면 참고해도 돼요~" 이 말의 끝부분에는 하트모양도 하나 붙어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책을 펼치지 않는다. 책을 펼쳐서 답을 알아낼 수 있을 실력이면, 역시 쉽게 풀 수 있는 "쉬운"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관악산이나 신촌 또는 안암동 쪽으로 가야 할 친구들이 수능날 컨디션이 안좋아서 나랑 같이 수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친구들이랑 수업을 들으면 본의아니게 피해를 보게 된다. 평균 5점짜리 시험을 평균 10점으로 올리는 엽기적인 짓을 자행하는데, 100명정도 되는 수강생의 평균을 두배 올리기 위해서 이친구 개인의 점수가 몇점이 되어야 하는지는 직접 계산해 보자.

2.
사실 해석학은 쉬웠다. 수학과의 해석학 테크트리는 미분적분학-해석학-복소해석학-실해석학-함수해석학으로 올라간다. 배우는 내용은 어차피 하나인데, 미분과 적분을 잘 정의하는 것이다. 별거 없다. 한번은, 복소해석학 시험을 다 보고나서 교수님이 100점 만점인 시험을 채점하신 후 50점 만점으로 고쳐준 적이 있었다. 중간고사였다. 그 점수 그대로 성적을 줬다간 그 다음해에 2배 늘어난 수강생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에 교수님도 조금은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 (교수님의 미래다. 내년에 채점을 2배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 또는 수업을 2배 더 하게 되거나.) 성적을 조금 높여주는 것이다. 그때 40점 받은 선배는 포항공대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난 당시 30점으로 2등 먹었었다.

3.
난 2학년때 3학년꺼 듣고, 3학년때 4학년 과목을 듣고, 4학년때 2학년 과목을 듣는 미친짓을 자주 했다. 물리학과+수학과 복수전공하면서 4년만에 졸업하려면 미쳐야 했다. 3학년때 들은 4학년 과목인 푸리에 해석학 시간에, 갑자기 선배 하나가 "교수님 야외수업해요!" 라고 외쳤다. 그 수업은 그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진행되었다. 1차부터 6차까지 교수님이 다 계산했던, 그런 하루였다. 그 뒤로 아무도 야외수업하자는 얘기 안꺼냈음.

푸리에 해석학 시험은 5문제였고, 교수님이 시험시간에 시험지를 들고와서 나눠주시면서 문제를 설명하고, 제출은 그 다음주, 즉 기말시험 다 끝난 후의 수요일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무려 1주일이나 줬다는 것이다. 토론하는 건 상관 없지만 양심껏 베끼지는 말라는 주의사항만 주시고는 그냥 집에 가서 풀어보라고 하셨다. 다른 과목들 시험이 목요일날 끝나서, 금, 토, 일, 월, 화, 그렇게 5일동안 풀었는데 3문제 풀고 2문제 정도 부분점수 받았다. 학점은 그냥 학번 순서대로 받아서 난 막내니까 B+. 감사했다. 채점한대로 성적이 나왔으면 D정도 받았을 것이다.

4.
대학원때 함수해석학을 들었었다. 하지만 과목 이름만 함수해석학이지, 교재는 학부생들이나 보라고 쉽게 쓴 "Principles of mathematical analysis" (W. Rudin)의 책을 썼다. 5명의 수강생 중에서, 정말 예쁜 여자 선배 한명 빼고 나머지 4명은 그 책의 연습문제 하나를 푸는데 1주일 내내 토론해야 했다. 그 여자 선배는 교수님이 실력을 인정한 유일한 학생이었는데, 석사 받고서 위스콘신으로 장학금 받고 유학갔다. 참고로 W. Rudin의 그 책은 수학과 학부때 배우는 4년치 과정이 다 들어가 있는 책이다. 한학기 내내 배운게 3장까지였던가.

5.
2학년 1학기때, 중간고사에서 95점을 받아서 2등을 했다. 1등은, 무려 기계공학과의 최씨성을 가진 아저씨. 군대 갔다와서 머리가 녹슬었다고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을 하더니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1등을 했다. 보통은 공대에서 물리를 좀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물리학과 수업 들으러 왔다가 4주만에 gg치고 그냥 강의 포기를 하거나, 중간고사 불참으로 F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대단했다. (이건 공대생을 비하하려는게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례가 있다.) 아무튼, 그래서 당시 수리물리 조교 선배에게 불려가서 갈굼받고, 어쨌든 기말고사에서는 1등을 했다. 나 참.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니었지.

어쨌든 기말고사때는, 교수님이 작정을 하셨는지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감독을 하던 조교 선배가 힌트도 많이 주고 그랬는데 어쨌든 애들 점수는 반토막 났다. 한 10명쯤 남자, 감독하던 형이 아이스크림을 쐈다. 포기하고 일찍 나간 애들은 그 맛을 모를 거다.

6.
2학년 1학기때 현대물리 시험은 모두들 기출문제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시험 전날 늦게까지 연구에 매진하시던 교수님이, 모여서 스터디를 하고 있던 우리를 발견하셨다. "이건 뭔가?"

그리고 그날 교수님은 밤새 뭔가를 하셨고, 기말시험은 기출문제 목록에 새로운 유형이 추가되었다.

7.
2학년 1학기 때 고전역학 시험을 보고 있었다. 감독을 하던 조교 형이 이렇게 외쳤다. "여름방학까지 앞으로 15분 남았다. 안나가냐?"
마지막 시험이다보니...

아무튼 그 말에 15분을 못버티고 나간 애들 몇 있더라.

8.
3학년때 전산물리 시험은 내가 요점정리를 만들었었는데, 카오스에서 안나올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가 피봤다. 수강생 전원이 내 요점정리를 보고 공부했었기 때문에, 그 카오스 문제는 아무도 못 풀었다. -_-;

9.
3학년때 4학년 핵물리 수업을 들었었다. 역시 미친짓이긴 한데. 이 과목의 담당 교수님은 앞에 얘기한 현대물리와 같은 교수님이었다. 4학년은 취업 준비와 대학원 준비 등이 겹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친절하게 예상 문제를 많이 알려주셨고 모든 수강생 (6명)은 예제와 노트 필기 위주로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중, M스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시험 감독을 하시던 선배님이 시험을 보던 다른 선배의 답안지를 보더니 "넌 혼자 공부했냐?" 이렇게 물어보신다. 사실이었다. 우린 5명이 같이 공부했고 그 선배는 혼자 공부했었다. M스킴을 전개할 때는 표가 길게 늘어지는데, 우린 모두 세로로 썼고 그 선배 혼자 가로로 썼다더라.

학점은, A+, A, B+이 사이좋게 2명씩, 학번 순으로 나왔다. 난 물론 B+이었다.

잊어먹기 전에 소소한 기억들을 정리해 보았다.
by snowall 2010. 4. 25. 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