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 있을 때, 수료식 준비를 하면서 훈련병 소감문이라는 것을 발표하는 사람을 뽑는 일이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이냐 하면, 훈련병 1400명을 대표해서 단 1명이 발표하는 것이다. 훈련병 가족들이 대략 1000명 정도 온다고 치면, 다른 관계자들 포함해서 대략 250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것이다. 보통은 수료식 준비를 하는 대대에서 적당히 한명을 뽑기로 되어 있다는데, 이번 기수에서는 내가 소속되어 있던 1중대에서 뽑기로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세상에, 내가 2500명이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쓴다 하더라도 방문객들 중에서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엔 내 글을 확실히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 넣어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글을 발표하는 것은 나의 자신감을 키워줄 것이다. 어쨌든 정말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 경쟁에 나만 참가한게 아니라 다른 경쟁자 1명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발표자를 선정하는 것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결정되었다. 투표에서 졌기 때문에 포기할 뻔 했던 나에게 어쨌든 50%의 확률로 한번의 기회가 더 생긴 것이므로 아무튼 받아들였다.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누가 먼저 제비를 뽑을지 정했는데, 내가 먼저 뽑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X를 뽑았고, 난 발표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쉽지는 않았다. 나는 내 글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더 좋은 글이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비뽑기에서 졌기 때문에 여기서 더 밀고 나가는 것은 의미도 없고 남들이 받아들일만한 명분도 없었다. 거기서 내가 꼭 발표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여러가지로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냥 포기하기엔 정말 너무나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다가 취침 시간이 되어서 침상에 누웠다. 너무 큰 기회를 날려먹은 하루였기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고, 그럼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일 뿐이었다. 제비를 뽑을 때, 내가 뽑은거 말고 한번만 더 생각해서 바꿨더라면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까? 이것은 로또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왜 하필 그렇게 잡았을까. 온갖 후회가 내 머리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몇시간을 생각하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추첨에서 떨어졌다는 것도, 내가 발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런저런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내가 어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나서야 어제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쉬움, 후회, 자기비하, 기타 등등.

그리고 나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요점은, 이 기회가 대단한 기회이긴 하지만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인데, 이 기회를 포기하지 못하면 나중에 더 큰 기회를 포기해야만 할 때는 더 힘들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그동안 내가 확률 게임에서 얼마나 낮은 승률을 보였는지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난 행운에 기대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99%의 노력으로 정말 잘 해놓고서도 1%의 행운이 부족해서 포기했던, 실패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단 1%의 행운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재수없는 인생을 돌파하려면 100%의 실력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실력 없이 성공을 논할 수 없는, 참 운도 지지리 없는 인간이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에나 쓰는 말이라는, 멋진 말을 누군가 남겼던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해야 할 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다.
by snowall 2010. 6. 6.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