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창조론 탐구학습"이라는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저자들은 창조론-진화론의 구도가 세계관의 문제라고 하는데, 여전히 창조론이 왜 과학이 아닌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_-;

진화론이 "과학적인 이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창조론자들 스스로 진화론을 과학적인 이론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반론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이론은 반증 가능해야 하며, 반증 가능한 실험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창조론이 과학적인 이론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진화론이 틀렸기 때문에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창조론이 진정 과학이 되고 싶으면, 창조론에서만 설명 가능한, 또는 창조론을 부정할 수 있는 실험이나 관찰 결과를 예측하거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창조론의 근거는 모두 진화론을 부정하는 결과로서만 제시되고 있다.)[각주:1]

물리 부분에서는 열역학 제 2법칙을 맘대로 해석해서 쓰고 있다. -_-;
폐쇄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 현상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해야 하는데, 진화는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므로 거짓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엔트로피 변화 없이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창조가 진리다. 뭐 대충 이런 주장이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면서 외부 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만약 엔트로피 감소가 걱정돼서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도 기적이다.

생물 부분에서도, 내가 비록 전공은 아니지만, 진화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한 부분이 많다. (일부러 잘못 해석하고 있거나.)
저자들은 진화가 항상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진화는 "발전"이 아니라 "적응"이다. 저자들은 돌연변이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생존에 나쁜 돌연변이로만 나타나므로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176쪽)
그러면서 예로서 머리가 두개인 거북, 앞다리가 없는 개, 깃털이 없는 닭, 등이 붙은 쌍둥이,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생존에 나쁘다는건 인간의 편견이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환경이 머리가 두개인 거북이 살기 힘들고, 앞다리가 없는 개가 살기 힘들고, 깃털이 없는 닭이 살기 힘들 뿐 만약 그런 형태가 번식에 더 유리한 - 가령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거나 -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만드는 돌연변이는 퍼질 수밖에 없다.
만약 물고기가 물 바닥에서만 산다면, 눈을 두개 만드는 것 보다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물고기가 눈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원을 다른데 사용함으로서 생존에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아무튼, 아무리 학생들을 위한 교양과학서적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들이 몇군데 있어서 지적하고 넘어간다. (이건 창조론 관련 서적이라서가 아니라 과학 서적으로 기본이 안된 것이라 지적하는 것이다.)

우선 참고문헌이 없다. 저자들이 인용한 진화론자와 창조론자들의 주장에 관한 참고문헌이 전혀 없다. 심지어 진화론과 창조론을 공부할 수 있는 책이나 문헌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학생들은 이 책만 보고 공부하란 건가? 이 책의 유일한 참고문헌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이다. 그리고 어디서 인용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가령 236쪽에 "다윈주의자들은 이처럼 더 이상의 환원이 불가능하게 복잡한 시스템을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게 아직 연구가 덜 되어서 설명을 못하고 있는건지 진화론이 원래 설명 못하는건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 (물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은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언제나" 설명할 수 있다.)

둘째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공평하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진화론을 무시하는 시각에서 씌여졌다. 가령, 마지막 부분에서 진화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나쁜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진화론이 나쁘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창조론 뿐만 아니라 기독교 때문에 일어난 나쁜 사건은 더 많고, 죄질도 더 나쁘다.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기타등등.)

셋째로, 자연과학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역사적인 기록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대홍수 전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대홍수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민족이든 비가 좀 많이 내린 적은 있었을 수 있고 - 지금도 "미친듯이" 퍼붓는 홍수쯤은 세계 어딘가에는 매년 있다 - 옆동네 애들이 "야,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는 배 만들어서 물이 마를때까지 도망다녔다더라"라고 말한걸 듣고 "오, 너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좀 멋진데? 우리 할아버지도 비 많이 오면 그랬을 것 같아"라고 하면서 전설을 만들어 내는건 흔히 있는 일이다.

넷째로, 자연과학의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그 자연과학 이론이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319쪽을 보면, "진화론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적자생존이 자연의 원리라고 한다면 가난한 자, 무식한 자, 불구자, 지체부자유자, 노인과 같은 약자는 이 사회에 발붙일 데가 없다"고 한다. 그건 이 사회가 그런 사람들에게 알맞지 않기 때문이지 "진화론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노인이 살기에 편한 세상이 온다면, 노인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무식한 자가 살기에 편한 세상이 온다면 무식한 자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다들 무식해 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회를 바꿔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사회적 문제) 과학 이론을 바꿔서 해결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진화론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고 있다. 당연히 이 사회를 현재 상태 그대로 둔다면 약자가 살기 힘들다. 그럼 그걸 고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을 창조론으로 바꾸는것만이 해결 방법이라고 하는 편견을 버려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부지 선정으로부터 빚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불만을 해결하려면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치면 된다. 참 쉽죠?)

저자들은 진화론부터 다시 제대로 공부하고 책을 쓰기 바란다. 어쨌든 이 글은 그래서 "종교"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좀 과학적으로 씹어보려고 책을 펼쳤는데, 과학적인 부분이 없어서 씹을 수가 없다. 껌을 샀는데 껌이 없어서 껌종이를 씹어야 하나 고민중인 상황이랄까.
  1. 유명한 예로 마이켈슨-몰리의 빛의 속력 측정 실험이 있다. 이것은 빛의 속력 측정이 목적이 아니라, 빛의 매질인 "에테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검증 실험이었다.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가설) 1년 내내 측정할 경우, 또는 방향에 따라, 빛의 속력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실험 결과, 계절에 따라서도 방향에 따라서도 빛의 속력은 차이가 없었다. 어쨌든, 오차 범위 내에서, 에테르의 존재는 부정되었다. 창조론은 이런 종류의 실험을 설계할 수 있을까? [본문으로]
by snowall 2010. 8. 15. 0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