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호?"님의 블로그에서 굉장히 멋진 글을 읽고, 공감하는 바를 적어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었음은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영어 공부에 목매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는 것만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영어 교육 열풍에 편승하여 우리나라다운 학원 열풍이 부는 것도 사실이다.
내 경우를 보면, 물리학은 대부분의 논문이 영어로 나오고, 대부분의 학회는 영어가 공식 언어이다. 그리고 많은 물리학자들은 영어권 나라에 살고 있거나 영어를 배우기 쉬운 나라에 살고 있다. 교수님들은 미국 가서 공부하는게 아직은 가장 낫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입자물리학은 내 생각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닌 듯 싶다. [각주:1]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난 영어를 공부하고 그럭저럭 해야 하는 환경에 있다.
사실 난 영어를 싫어했다.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를 고를 때도 알파벳이 싫어서 중국어를 선택했었더랬다. [각주:2] 그런데 대학 다니고 대학원 와서, 내가 하고싶은 공부를 하려다보니 좋은 책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더라. 그리고 학회 가서 질문을 해보려고 해도 다 영어로 물어봐야 알아들으니, 매번 교수님께 통역 부탁드릴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내가 질문해야 한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학회에는 나와 교수님이랑, 다른 몇명의 학부생들과 같이 갔다. 학부생중에 유학을 준비하는 선배가 한명 있었는데, 난 정말 그 선배가 영어를 공부하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영어공부하는데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건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국제 학회라서 발표하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난 그 사람들 발표를 내용은 못 알아들어도 말이라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궁금한건 질문도 해보고 그랬다. 다른 학부생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선배는 유학도 준비하고 있으면 외국에서 공부하는건 어떤지, 뭐 이런거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거기서 다른것도 아니고 영어시험을 위한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었으니, 어찌아니 답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영어를 잘하는 외국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랑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지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막말로,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더라. [각주:3] 학회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어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물리에 집중한다. 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느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건 저 사람이 말하는 내용에서 물리적인 의미가 얼마나 제대로 전달되느냐이다. 내 생각엔 I love you를 I you love라고 얘기해도, 우리가 외국인들로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사랑한다, 당신을"이라고 듣는 정도의 어색함이랄까? 그정도의 어색함은 극복될수 있다고 본다. 난 가서 프레디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내가 대충 얘기해도 친절하게 농담도 섞어서 얘기해준다. 물론 나야 농담 이해하는데 애먹었지만, 재미난 친구였다. 물리도 잘하고. 그 친구가 얘기해기를 "Your English speaking is better than my Korean"이라고 하길래 난 "definitely never -_-;" 라고 해줬다. 쉽지 않은가?
그리고 국제 학회 가서 들은 영어는 아주 다양하다. 미국식 영어, 일본식, 중국식, 한국식, 멕시코식[각주:4] 영어를 들었는데, 전부 발음이 다르다. 그런데 영어 잘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아들었다. 나 역시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앞서 얘기했던 선배는 일본 사람들 발표는 발음 안좋다고 안 들으려고 하더라. 그거 이해 안가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입자 물리학을 유학가서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미국식 발음만 들으려고 하면 어떡하나. 엄청나게 다양한 나라에서 유학 와서 같이 공부하고 연구할텐데, 미국식 발음만 들리면 별로 좋지 않다.
내가 받아본 토익 최고 점수가 640점이고, 다른 친구들은 800점도 넘어간다. 그런데 외국인 앞에서 그 사람이랑 농담따먹기 하는건 나다. 어이쿠, 당황스러워라. 그래서 "야, 너도 뭐좀 말해봐"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요?"라고 반문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대충!" 이라고 해 줘도, 얘기 못한다. 그런 마당에 내 토익 점수를 밝히면 잘난척하는거냐고 한다. 도대체 어느쪽이 어떻게 잘난척인거냐. 외국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 보니까 느껴지는 점은, 그 사람들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단어는 고등학교때 배운 것 정도이다. 정말 전문용어나 명확한 뜻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물론 학회는 대부분 전문용어가 필요한 장소지만,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 나온 예문만 그대로 말해도 충분히 되겠는걸.[각주:5]

물리학을 배워서 어디다 쓰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든 곳에!"이다. 정말로 모든곳에 쓰이지만 다들 싫어한다. 영어는 배워서 어디다 쓰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화할때"이다. 정말로 대화할때 쓰이지만 다들 말은 안한다. 어제 토플 준비하는 친구가 얘기하기를, 영혼을 팔아서 영어를 잘할수 있다면 당장 팔겠다고 하더라. 뭐 그래서 "응, 많이 파세요"라고 대꾸해주긴 했다만, 너무 목매는것 같아서 아쉬웠다.

발음의 경우, 일본 사람들이 얘기하는건 단어 자체는 발음이 이상한데, 어순이나 문장 구조는 꽤 정확했다. 무턱대고 못듣겠다고 욕할게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해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상해 보인다. r과 l을 굳이 구별해야 하나? p와 f는 알아들어야 할까? th를 "스-"로 말하는 것과 "뜨-"로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일까?[각주:6]

내게 있어 영어는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물리학자들과 토론할 수 있게 해 주는 의사소통 도구이다. 물론,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부럽긴 하다. 하지만 내가 저만큼 영어를 잘하면 지금 영어를 공부하는게 아니라 물리학을 좀 더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부러워한다.

  1. 설마 이런걸 보고 사대주의라고 말하는 분은 없으리라 믿는다. [본문으로]
  2. 당시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또다른 과목은 프랑스어였다. 그리고 난 중국어 성적이 30점대였다. [본문으로]
  3. 발음이 나빠서 못알아듣지는 않는 것 같다. 일본사람들의 전통적인 발음을 들어보면, 그때마다 나는 자신감이 충만해지는데, 저건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야! 랄까. [본문으로]
  4. 멕시코 사투리는 r을 rrrrr로 발음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5. 물론, 그랬다면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은 I'am a boy, you're a girl인가? [본문으로]
  6. 물론 알아듣게 발음하는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발음 자체보다 중요한건 자연스럽게, 문법에 맞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발음이 정확한데 어순이 이상한 거랑, 발음은 이상해도 어순이 정확한 거랑, 어떤 경우가 알아듣기 쉽고 한국말을 더 잘한다고 간주하겠는가? [본문으로]
by snowall 2007. 3. 25. 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