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이슈들을 보자.

1. 황우석 아저씨 지지자들
2. 이명박 아저씨 사인 위조
3. 창조론의 창궐

선정 순서나 방법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보이는대로 적어 본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멀더와 스컬리의 주장과는 다르게, 진실은 저기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지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저런 류의 거짓말들은 정답을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고, 과연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창조론 얘기 같은 경우, 진실을 아는 것이 신밖에 없는데 과연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신이 직접 계시를 내려서 진화론이 맞다고 하면 창조론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럴리 없다고? 글쎄. 신이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진화론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다뤄져야 한다. 여기다가 신이 쐐기를 딱 박아서 "내가 창조 안했다"고 얘기하는데 여기다가 대고 토를 다는 사람은 지옥에나 떨어지겠지.
나 역시 무언가를 믿고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나로서는 구별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줄 사람도 없다. 누군가 "그거 구라야, 넌 이미 낚였어"라고 확인해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뭔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와, 어딘가에서 읽어본 얘기와, 내 머릿속에서 적당히 꾸며 본 가설과 이유를 근거로 하여 논리로 포장하여 맞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난 창조론은 틀렸고 진화론이 맞다고 믿는다. 난 황우석 아저씨는 아무튼 구라를 쳤다고 믿는다. 이명박 아저씨는 사인을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부 믿음이다. 이 믿음에 무언가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한테 믿으라고 얘기하려면 뭔가 부족하다. 내가 믿는 것을 남들도 믿으라고, 내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위태위태한 신의 존재만 해도 그렇다. 요즘같은 세상, 신이 있었다면 이딴 세상을 이대로놔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신이 있어서 부도덕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근데 그건 일단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거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세상의 혼란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다.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를 굳이 신의 권능이라든가 누군가의 음모로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간편하다. 딱히 근거도 없지 않은가. 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내세우는 근거라고 해 봐야 성경의 어떤 구절들인데, 그건 이미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이고 벌써 수천년이 지난 얘기다. 그걸 믿는거나 단군 신화를 믿는 거나 거기서 거기다.
미국 속담인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각주:1]. 그 반대 얘기도 있던데. 믿는 것만 본다고.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는 이미 결정된 일이다. 진리든 진실이든 바꿀 수는 없으며 변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결정이다. 진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진리만 믿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아집과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들 중에 열린 마음을 갖고 남들의 믿음과 생각을 인정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고 해도 줏대 없다고 욕을 먹는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면, 일단 자신이 믿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고, 틀린 것 같다면 자신의 믿음을 고쳐야 할 것이고, 맞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바꿔야 할 것이다. 문제는 둘 다 힘들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큰소리 치는 것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보지 못했다. 진짜 순수한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당히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많은가. 다 자기 고집에 빠져 사는데, 논리가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메꿀 따름일 뿐이다.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수많은 소식을 접하고, 아주 많은 낚시글들을 보고 있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동된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겠지. 그걸 전부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짜로 의미있는 것은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 밝혀지지 않을 진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언젠가 진짜 진실이 밝혀져서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에서 진실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얘기를 다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이데아의 세상에 살고 있고 나는 그 밑에서 진실의 그림자만 보면서 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할 따름이다. 다 틀렸다. 이건 이미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을 뛰어 넘은 엽기적인 추측에 다름아니다.
데카르트가 이 방법론을 처음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 아저씨는 맨날 의심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심했고. 그치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답이 없거나 자기가 답이라고 생각하는게 답이니까 별로 의심한 의미가 없다. 진짜 의심은, 자신이 믿는 모든 진실을 의심하고,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불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의심만 하라는 뜻이다.
뭐, 이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우정이나 애정을 의심하는 쪽으로 가 버리게 되면 의처증이 나오고 친구랑 절교하고 그러는 거지만. 그건 그 사람이 진실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믿는 것이 전부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바람 피운게 의심을 넘어서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람이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한번쯤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것을 싸그리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세상에 진실 중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내가 어제 화장실을 몇번 갔다 왔는지는 내가 까먹어 버리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 단 하나의 진실이 있지 않겠는가. 위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1. Seeing is believing [본문으로]
by snowall 2007. 6. 12. 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