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가장 큰 영향은 부모님이고, 그 다음은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이다. 작가인 칸자카 하지메가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스토리를 쓴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내가 거기서 발견한 의미는 아주 많이 있다. 시간만 있으면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은, 그런 애니매이션이다. 내가 블로그에 쓰는 많은 글들은 책을 읽고 생각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슬레이어즈의 철학에서 나타난 것들이 많다.

주인공 리나 인버스의 가치관은 참 흥미롭다. 악인에게는 인권이 없다거나, 사랑보다는 돈이 현실이라거나.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자신에게 해를 미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다. 슬레이어즈 시리즈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리나는 굉장히 이기적이다. 굳이 나쁜 짓을 하면서 살지는 않지만, 이기적인 쪽으로 선택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마왕을 퇴치하는 목적이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도 있지만, 리나가 마왕과 싸우고 끝내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 평화라든가 하는 멋진 이유가 아니다. 단지 마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아닌,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마왕과 싸우고 그만큼 강한 집념과 집착으로 승리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왕 퇴치+세계 평화라는 위대한 결말이다.

사실 세계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커다란 사건들을 보면, 그 시작은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었던 일들이 많다. 위대한 목적이나 목표를 두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냥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부터 시작된 것도 있다. 가령, 구글은 원래 대학원생이 자기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서 만든 작은 서비스에서 시작되었다. 슬래시닷은 그냥 글 올리는 게시판에서 시작했다가 그렇게 성장했다. 리눅스는 한 개발자가 커널을 조금 만들어서 올렸다가 그렇게 커졌다. 이것들은 시작할 때는 그다지 커질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대단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없었던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되어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페르마가 여백에 적어놓은 "나는 답을 알지롱 ㅋㅋ" 대충 이런 요지의 낙서같은 것에서 시작된 문제고, 300년 동안이나 수학자들을 괴롭힌 문제가 되었다.  페니실린은 플레밍이 실수로 열어놓은 샬레에 곰팡이가 하나 떨어져서 발견되었다. 페니실린의 발견이 위대한 업적인 것은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위대한 시작은 아닌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어릴 때 "빛의 속도로 달리면 거울에 내 얼굴이 보일까?" 라는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각주:1]

파인만은 핵무기 개발하는 공장에서, 공장 설계도를 보다가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도면에 쓰여진 기호가 창문같기는 한데 그걸 물어보자니 유명 물리학자로서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 파이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어봤다가, 설계상의 헛점을 발견해 버렸다고 한다.[각주:2]

아마 이 예들 말고도 사소한 이유로 시작된 위대한 업적은 많이 있을 것이다. 물론 원대한 꿈을 갖고 시작되어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건,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 목적이나 꿈이 꼭 그에 걸맞게 위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소해도 좋다. 가령, 6.25전쟁이나 임진왜란에 나가서 승리를 이끈 병사들은, 아마 불타는 애국심에 열심히 싸운 사람도 있겠지만 단지 당장 죽지 않기 위해, 단지 살고 싶기에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어떻든 그들이 열심히 싸웠기에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전기나 자서전, 평전 같은 걸 읽다보면 그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뭔가 달랐다. 업적을 이루지 못한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인가 중학교 다닐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기를 다룬 책이 학교에 돌아다녔었는데, 그것만 읽으면 김영삼 아저씨는 무슨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을 하기 위해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정치에 뜻을 품은 것 외에는, 그냥 평범했다고나 할까. 물론 진짜로 평범했으면 대통령까지는 못했겠지만, 아무튼 처음부터 위대했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 스스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코 위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위대한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 어떤가. 사소한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위대해지는 사람도 있는걸.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면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사소하고 비굴해 보일지라도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다 쓰고나서 느낀 점인데, 난 이런 글을 적고 나서 항상 나 자신은 내가 글에 적은 내용들을 그다지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뭐, 그렇다고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는다. 나야 실천 못하더라도, 아무튼 "멋진" 얘기를 적어놓긴 했으니까 누군가 이 글에 공감하고 실천하여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맘에 안들면 따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무슨 상관이랴.


  1. 진짜로 그게 모티브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본문으로]
  2. 이것도 정확한 버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by snowall 2007.07.07 01:46
  • 일취 2007.07.07 18:26 ADDR EDIT/DEL REPLY

    파인만 같은 경우엔 정확하다고 봐도 되겠는데요.
    청사진에서 이상하게 보이는 십자모양을 가리키며 "이 밸브가 막히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던 것이
    설계상의 허점을 잡아낸 것이 되었으니 말이죠.
    정작 본인은 "그건 창문인데요" 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