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종교가 없다. 다만, 종교 비슷하게 뭔가 갖고 있는 관념같은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영향을 미친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도덕경에는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가 5천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뜬구름 잡는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읽는 사람들마다 다들 자기 맘대로 해석한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노자는 책을 한권 지었으나 그 책을 읽는 사람이 각자가 전부 맘대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 각각이 모두 한권의 책이요, 따라서 노자는 책을 읽은 사람만큼의 책을 지었다고 해도 된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되겠다. 아무튼, 나는 노자의 책을 읽고서 인생의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 몇가지를 이 글에서 적어 보고자 한다.

주의사항 : 어느 장의 전부를 인용하지 않고 일부만을 이용할 것이다. 따라서 장 전체를 읽었을 경우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미리 일러둔다. 내가 적은 글은 다만 나의 생각일 뿐이며, 도덕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직접 원본이나 번역본을 찾아서 읽기 바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 불변의 도가 아니다. (1장)
말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말은 사람과 함께 살아있으며, 사람이 변하면 함께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 불변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영원 불변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도덕경의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이나 글자로 기록되어서 남에게 전달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영원 불변의 도를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도덕경조차 그것은 불가능하다. 노자 스스로도 도덕경에 도를 본질 그대로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덕경에 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몇자 적어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있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것은 찾을 수 없는 곳에 적당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관철해 나가는 것이다.

발끝을 제껴 디딘 자는 설 수 없고. 가랑이를 한껏 벌린 자는 걸을 수 없다. (24장)
가랑이를 한껏 벌려봐라. 걸어갈 수가 없다.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가랑이를 벌린 것은 힘든 자세이다. 즉,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부자연스러운 자세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자세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서,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모든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부드럽게 굴러가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가 없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무엇이 자연스러운지는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앞으로 그것을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우선 그것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그에게서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선 그에게 주어야 한다. (36장)
음? 이상한 말이다. 풍선은 불면 불수록 커지지만 너무 많이 불게 되면 터져버려서 결국 쪼그라들어 버린다. 그 어떠한 세력도 영원할 수는 없다. 너무 강한 세력은 더 강해질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그 한계를 넘게 되면 망하게 마련이다. 사업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싶다면 일단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건 대단히 추상적인 얘기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 말을 있는 그대로 현실에 반영하면 100% 확실하게 망한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건, 자신이 하는 사업이 어느 정도 커져서 그냥 놔둬도 금방 망하지 않을 정도라면, 그것을 더 키우기 위해서 힘쓰는 부분을 줄이고 그동안 신경쓰지 못한 부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곳의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략, 몇가지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내가 사는데 어떤 철학이라고 한다면, 이정도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by snowall 2006. 8. 30. 2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