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워낙 흡연자들을 곁에서 깊이있게 관찰하다보니 중독되었다고나 할까. (사실 담배가 많이 땡긴다 -_-;)

어쨌든.

금연구역의 존재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다. ...라고 한다. 어쨌든 금연구역이라고 정했으면 지켜주는 것이 도리일텐데, 안지키는 사람도 많다.

애연가들은 담배는 기호품이고 좋아서 피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금연구역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혐연권과 건강 문제를 든다.

애연가들의 행복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고, 혐연가들의 행복은 담배연기를 맡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두 집단 사이에 물리적인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한 모순되는 행복 추구권이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을 침해받는가?

애연가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선택이 가능하다. 즉,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런데 그 근처에 있는 혐연가들은 담배연기를 맡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다른 자리로 옮기면 되겠지만, 사람이 멀쩡히 앉아 있는데 다른데로 옮기면 그것도 나름대로 기분나쁜 상황 아니던가. 더군다나 아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경우에는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은 불행해질 것이다.

그럼 이제 논의를 진행시켜서, 애연가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주장해보자. 그럼 상황이 바뀌는데, 애연가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도록 강요받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혐연가들은 절대로 담배 연기를 맡지 않게 되므로 행복해졌다. 이것은 올바른 상황일까?

그렇다면, 자유에 맡겨서 애연가들이 흡연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앞서 논의한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냐 하면, 담배가 발견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애연가와 혐연가 사이에 싸울 일이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뭐, 이젠 더이상 없앨 수 없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좀 더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펼쳐보자면, 담배 생산은 생산자와 중간유통업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므로 사회 전체적인 행복의 관점에서는 이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속에서 콜록거리는 혐연가들의 불행보다 사회 전체의 이익이 좀 더 큰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이다. (단, 내가 이 관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담배를 좋아한다면 역시 문제는 사라진다. 모순의 한쪽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금연구역 싸움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싸움일 것이다.
by snowall 2008. 1. 31. 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