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수님의 특별 지시로 베낀 레포트를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항상 그렇듯, 나도 그랬듯, 베끼던 애들이 베끼는 것이고 그 속에서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또한, 물리 문제가 다들 그렇듯이 하나의 풀이가 맞으면 다른 올바른 풀이는 그 풀이하고 대단히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쨌거나 모르는 학생들도 아니고, 다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인지라 레포트 골라내는 작업은 내 가슴에도 멍이 드는 작업이다. 물론 그런걸로 멍이 들 내 정신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다. 어쨌건 무심히 복사한 것들을 찾아내는데, 3개 그룹이 나왔다. 2개 그룹은 각각 다른 소스에서 베껴온 것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혐의점을 찾지 못한 그룹이다.

복사인것 같다고 표시해서 교수님께 드리고 찬찬히 다시 생각해 보는데, 참 이 시대가 암울하더라.

베껴서 냈으면 당연히 그 개인의 손해이다. 공부를 못한 거니까. 여기에 점수가 감점되면 당연히 그 개인의 손해다. 물론 학문이라는 것이 지극히 창조적인 분야이므로 남의 공로를 훔쳐서 사용하는 것은 근절되어야 하는 악덕이다. 하지만 이렇게 베껴서 낸 것을 일일이 다 읽어보면서 손으로 골라내야 하는 것은 시대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베끼지 않을 것이 확실하고, 그걸 교수와 학생이 서로 믿으면서 레포트를 내고 평가하면 얼마나 좋을까.

뭐. 이런 수준은 요순 시대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신뢰성이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서로 베끼고 자신의 실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어디에서도 자신의 것이 없이 남의 공로에 얹혀서, 묻어서 가야 하는 인생이 될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레포트 정도는 괜찮고,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는 자신만의 창조적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그래도 괜찮다는 것일까.

어느쪽이든, 모든 사람들이 당장의 레포트 점수나 학점이 아니라 내실있는 실력을 키우기를 바란다. 그게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이 내실있는 실력을 갖고 있다면 내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일을 부탁할 때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이고, 그 일이 내가 예상한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니 내가 앞으로 해 나갈 일이 착착 진행될 테니까.
by snowall 2007. 12. 23.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