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신이 가진 것을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은 나눔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그 즐거운 일을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가끔, 어쩌면 모든 경우에, 자신이 모든 이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더이상 즐겁지 않을 수 있다.
서울역에서 길거리의 노숙자가 손을 벌리고 엎드려 있길래 주머니를 뒤져서 500원을 바구니에 넣고 나면, 10미터를 못가서 다른 노숙자가 일주일을 굶었다며 빵이라도 사먹게 1000원만 달라고 한다. 다시 지갑을 열어서 1000원을 주고 나면 그 노숙자는 잠깐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똑같은 얘기를 또 하고 있다. 나는 뻔히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이런식으로 하루에 50건만 하면 5만원. 대략 하루 일당이다. 이런걸 몇년째 지켜보고 있다보면, 어째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고 계속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내가 도와주기 때문에 그것이 만성화 되어서 일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돈을 주지 않게 된다. 돈을 주지 않는다고 그 노숙자들이 나를 그냥 지나쳐 가지는 않는다. 눈길이라도 살짝 스치면 바로 다가와서 손을 한번 벌려보고 간다. 그럴때마다 어쨌든 내 마음은 참 힘들다.
이런 논리가 있었다.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하러 간 사람들이 납치되었을 때, 한국에도 못먹고 못사는 사람 많은데 굳이 외국에 험한데 가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한 사람의 능력, 한 단체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도와 "빛"을 주면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기왕 돕는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도우면 더 낫지 않은가.
예를들어, 내 수중에 적당히 기부할 곳을 찾는 100만원의 현금이 있다고 하자. 어딘가에 기부해서 좋은 일에 쓰이기를 바라는데, 어디다 기부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난치병 환자에게 줄 수도 있고, 어딘가 돈이 없어 학비도 책을 살 돈도 없는 가난한 학생에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주면 환자가 울고, 환자에게 주면 학생이 울게 된다. 그리고 누가 더 돈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돈을 갖고 있는 내가 결정하게 된다. 내가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죽거나, 젊은이의 꿈이 좌절된다. 물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있고, 각각 자신이 정한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하고싶은 선행을 하고 있으므로 혜택은 그럭저럭 다양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전체를 보지 않고 내 개인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의 선택에 의해 돕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미안하게 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정이 있을 때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맙다"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과 내가 아쉬운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이 없을 경우 이런 문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남을 돕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쪽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남들 신경쓸 여유가 없는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본다.
내 생각에, 착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조금은 양심을 검게 물들일 필요가 있다. 나의 한계에 부딪쳐서 돕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돕겠거니 하고 그냥 눈감고 귀막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고 이쪽 저쪽 모두 도와서 잘되게 만들려고 하면 어느쪽도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버릴 수가 있다. 자신이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딱 그만큼만을 실천하는 것이 성공적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단발성 도움은 없는게 더 낫다. 희망을 가졌다가 포기하는 것은 절망보다 나쁘다.
물론 이전 글에서 논의했듯이,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우선 상상해보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능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처음부터 세상 전체를 구원하려들지 말기를.
글이 조금 냉소적으로 흘러갔다. 최근 개인적인 경험으로, 희망을 줬다가 뺏는 것이 절망보다 더욱 사람을 좌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서울역에서 길거리의 노숙자가 손을 벌리고 엎드려 있길래 주머니를 뒤져서 500원을 바구니에 넣고 나면, 10미터를 못가서 다른 노숙자가 일주일을 굶었다며 빵이라도 사먹게 1000원만 달라고 한다. 다시 지갑을 열어서 1000원을 주고 나면 그 노숙자는 잠깐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똑같은 얘기를 또 하고 있다. 나는 뻔히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이런식으로 하루에 50건만 하면 5만원. 대략 하루 일당이다. 이런걸 몇년째 지켜보고 있다보면, 어째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고 계속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내가 도와주기 때문에 그것이 만성화 되어서 일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돈을 주지 않게 된다. 돈을 주지 않는다고 그 노숙자들이 나를 그냥 지나쳐 가지는 않는다. 눈길이라도 살짝 스치면 바로 다가와서 손을 한번 벌려보고 간다. 그럴때마다 어쨌든 내 마음은 참 힘들다.
이런 논리가 있었다.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하러 간 사람들이 납치되었을 때, 한국에도 못먹고 못사는 사람 많은데 굳이 외국에 험한데 가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한 사람의 능력, 한 단체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도와 "빛"을 주면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기왕 돕는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도우면 더 낫지 않은가.
예를들어, 내 수중에 적당히 기부할 곳을 찾는 100만원의 현금이 있다고 하자. 어딘가에 기부해서 좋은 일에 쓰이기를 바라는데, 어디다 기부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난치병 환자에게 줄 수도 있고, 어딘가 돈이 없어 학비도 책을 살 돈도 없는 가난한 학생에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주면 환자가 울고, 환자에게 주면 학생이 울게 된다. 그리고 누가 더 돈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돈을 갖고 있는 내가 결정하게 된다. 내가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죽거나, 젊은이의 꿈이 좌절된다. 물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있고, 각각 자신이 정한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하고싶은 선행을 하고 있으므로 혜택은 그럭저럭 다양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전체를 보지 않고 내 개인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의 선택에 의해 돕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미안하게 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정이 있을 때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맙다"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과 내가 아쉬운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이 없을 경우 이런 문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남을 돕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쪽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남들 신경쓸 여유가 없는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본다.
내 생각에, 착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조금은 양심을 검게 물들일 필요가 있다. 나의 한계에 부딪쳐서 돕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돕겠거니 하고 그냥 눈감고 귀막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고 이쪽 저쪽 모두 도와서 잘되게 만들려고 하면 어느쪽도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버릴 수가 있다. 자신이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딱 그만큼만을 실천하는 것이 성공적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단발성 도움은 없는게 더 낫다. 희망을 가졌다가 포기하는 것은 절망보다 나쁘다.
물론 이전 글에서 논의했듯이,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우선 상상해보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능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처음부터 세상 전체를 구원하려들지 말기를.
글이 조금 냉소적으로 흘러갔다. 최근 개인적인 경험으로, 희망을 줬다가 뺏는 것이 절망보다 더욱 사람을 좌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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